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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평산군지(平山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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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5년에 편찬된 황해도 평산군 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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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료제목 표제 平山郡誌 上․下
내제 平山郡誌
판심제 平山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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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01책 134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보기 上冊
平山郡誌序
郡誌凡例
目錄
卷之一: 地理(沿革, 疆界坊里, 面里, 山川, 場市, 物産, 古跡, 橋梁, 津渡, 堤堰, 形勝), 建置(文廟, 院祠, 公廨, 書齋)
002책 132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보기 下冊
卷之二: 人物(名賢, 文學, 忠臣, 孝子, 烈士, 孝婦, 烈婦, 文士, 文科, 武科, 生進, 官職, 官公吏, 儒任, 鄕任, 守臣, 墳山, 姓氏, 風俗), 人戶摠(人口, 戶數, 土地, 稅額), 付舊錄(田結, 田賦, 上納, 軍摠, 匠人, 府鎭, 倉庫, 糶糴, 錢貨, 壇社, 城堡, 烽燧, 撥所, 支站, 驛所, 各屯, 寺刹, 進上, 役價)
平山郡誌續修時校中任員錄
平山郡誌續修任員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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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내용 및 특징
1925년에 편찬된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읍지로서, 상․하 두 책으로 구성된 목활자본이다.
상책 권두의 「평산군지서(平山郡誌序)」, 하책 권말의 발(跋)과 지(識)를 통해 편찬 시기 및 경위 등을 알 수 있다. 편찬 연도는 을축년(乙丑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읍지 내용으로 볼 때 을축년은 1925년에 해당한다. 편찬 작업은 평산군 유림에서 주도하였다. 서문의 찬자는 당시 평산군수(平山郡守) 유훈섭(劉壎燮)이며, 발문은 조천식(趙天植), 지는 이용규(李容圭)가 썼다. 발문 앞에는 「평산군지속수시교중임원록(平山郡誌續修時校中任員錄)」과 「평산군지속수임원록(平山郡誌續修任員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천식과 이용규는 후자에 이름이 나온다. 조천식)은 편찬, 이용규)는 교정 및 교열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군지범례(郡誌凡例)」에 따르면, 본 읍지는 1802년(순조2) 평산부사(平山府使) 구행(具絎)이 편찬한 읍지를 저본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 증보한 기록은 ‘구지(舊誌)’ 기록 아래에 ‘신증(新增)’이라 표기한 다음에 수록하였다. 본문을 보면 구지의 기록은 ‘구(舊)’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외 범례 조목들은 인물 기록의 원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권두 목록에 따르면, 권1은 지리(地理)와 건치(建置), 권2는 인물(人物), 인호총(人戶摠), 부구록(付舊錄)으로 구성되었다. 세부적으로 지리편은 연혁(沿革), 강계(疆界坊里), 면리(面里), 산천(山川), 장시(場市), 물산(物産), 고적(古跡), 교량(橋梁), 진도(津渡), 제언(堤堰), 형승(形勝), 건치편은 문묘(文廟), 원사(院祠), 공해(公廨), 서재(書齋), 인물편은 명현(名賢), 문학(文學),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사(烈士), 효부(孝婦), 열부(烈婦), 문사(文士), 문과(文科), 무과(武科), 생진(生進), 관직(官職), 관공리(官公吏), 유임(儒任), 향임(鄕任), 수신(守臣), 분산(墳山), 성씨(姓氏), 풍속(風俗), 인호총편은 인구(人口), 호수(戶數), 토지(土地), 세액(稅額), 부구록은 전결(田結), 전부(田賦), 상납(上納), 군총(軍摠), 장인(匠人), 부진(府鎭), 창고(倉庫), 조적(糶糴), 전화(錢貨), 단사(壇社), 성보(城堡), 봉수(烽燧), 발소(撥所), 지참(支站), 역소(驛所), 각둔(各屯), 사찰(寺刹), 진상(進上), 역가(役價)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실제 본문의 내용은 목록과는 일부 차이가 있다.
권1 지리편의 연혁과 강계는 구지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평산은 고구려 때 대곡군(大谷郡)이라 불리던 지역으로, 일명 영지홀(靈知忽)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신라 때 영풍군(永豊郡)이 되었다가, 고려 초 평주(平州)로 바뀌었다. 성종 때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 때 지주사(知州事)로 정하였으며, 원종 때 복흥군(復興郡)에 병합되었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복구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평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평산의 읍호로는 연덕(延德), 동양(東陽)도 있었다. 강계 기록에는 금천(金川), 신계(新溪), 해주(海州) 등 인근 고을 및 경성(京城), 감영(監營)과의 거리 등이 나온다. 이 부분은 항목명이 ‘강계방리(疆界坊里)’로 되어 있는데, 그에 맞게 뒷부분에는 평산의 면리 구성과 각 면별 소속 리의 숫자, 호구수와 전답결수, 호결역(戶結役) 내역, 정도(程道)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본 읍지 편찬 당시의 상황은 다음의 면리 항목에 나온다. 평산군은 평산면(平山面), 보산면(寶山面), 금암면(金巖面), 안성면(安城面), 서봉면(西峰面), 문무면(文武面), 상월면(上月面), 인산면(麟山面), 신암면(新岩面), 세곡면(細谷面), 고지면(古之面), 적암면(積岩面), 마산면(馬山面), 용산면(龍山面)의 총 14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면별 소속 리의 이름까지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산지가 많은 고을이었던 만큼, 산천 항목에는 산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위치와 관련 고사는 물론, 그에 관해 쓰인 다수의 시문들까지 함께 수록해 놓았다. 장시 항목에서는 각 장시별 장세(場稅)를 특히 상세히 기록한 것이 눈에 띈다. 고적 항목은 구지 기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효종이 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숙했던 곳에 건립된 영소당(靈昭堂) 등 주요 고적들에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형승 항목은 새로 증보된 내용으로서, 배록정(排祿亭), 제금암(題襟岩) 등 형승지 20여 곳의 위치 정보와 관련 고사 및 시문이 실려 있다.
건치편에서는 향교(鄕校)에 관한 기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목록상에는 ‘문묘’로 되어 있으나 실제 항목명은 ‘교원(校院)’이다. 서두에 향교의 기본적인 정보가 정리되어 있는데, 위치와 연혁, 건물 구성 및 규모, 교생 및 재직(齋直)과 노비의 숫자, 전답결수, 소장 서책 등이다. 기지(基地)와 교사(校舍)의 면적 평수 기록은 새로 증보된 내용이다. 다음에는 향교 운영에 관한 각종 원칙과 규례들이 실려 있다. 앞부분에 이이(李珥)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의 전문을 수록해 놓았으며, 향교의 운영 법규인 교헌(校憲)과 석전대제(釋奠大祭)의 시행 규례인 대제식(大祭式), 그 밖에 양사정식(養士定式), 학전수세정식(學田收稅定式), 치부정식(致賻定式), 성묘중수식(聖廟重修式), 분번등록(分膰謄錄), 교중완의(校中完議) 등이 차례로 나온다.
다음으로는 서원(書院)과 사우(祠宇)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부분은 권두 목록상에 원사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항목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고려 초 무신 신숭겸(申崇謙)과 여말선초기 유학자 이색(李穡)의 위패가 봉안된 동양서원(東陽書院), 17세기 유학자 박세채(朴世采)의 위패가 봉안된 구봉서원(九峯書院), 태백산성(太白山城)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유금필(庾黔弼),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의 철상(鐵像)이 모셔져 있던 태사사(太師祠)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위치와 연혁, 건물 구성 및 규모, 원생(院生) 및 모입(募入)과 노비의 숫자, 전답결수, 소장 서책 등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으며, 관련 기문(記文) 등도 전문이 실려 있다.
공해 항목은 관아 건물에 관한 기록을 담은 부분이다. 주요 건물들이 갑오년(1894) 동학농민전쟁시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증’ 표기하에 이이)가 지은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뒷부분에는 본 읍지 편찬 당시 평산군에 있던 관공서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다. 군청을 비롯하여, 철도감부(鐵道監部), 경찰서, 우편소, 정거장, 금융조합, 등기소, 공립보통학교, 사립학교 등 각종 근대 시설들이 적혀 있다.
권2에서는 인물편이 전체 분량의 절반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평산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명현, 문학, 충신, 효자, 열사, 효부, 열부, 문사로 분류하여, 해당인의 성명과 본관, 관력, 주요 행적 등 간략한 인적 사항을 기록해 놓았다. 명현 항목에 백인걸(白仁傑)박세채), 충신 항목에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박수경(朴守卿), 신숭겸 등이 눈에 띈다. 또 문무과 및 생원진사시 급제자들은 문과, 무과, 생진 항목에 기록하였고, 평산 출신의 관직자들은 관직 항목에 수록하였다. 목록에 나오지 않는 부아절제(府衙節制) 항목에는 1895년(고종32) 평산군으로 바뀌기 전 평산도호부 시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이하 관속들의 구성과 숫자가 적혀 있다. 본 읍지 편찬 당시의 상황은 다음 관공리 항목에 담겨 있다. 군수와 군속(郡屬)을 비롯하여, 도평의원(道評議員), 경찰서장, 순사, 우편국장, 공립보통학교장, 금융조합장 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수신 항목은 역대로 평산의 수령을 지낸 인물들의 명단이다. 1516년(중종11)부터의 기록으로, 마지막에는 본 읍지가 편찬될 당시의 군수 유훈섭의 이름이 나온다. 풍속 항목 다음에는 ‘삼경요(三經擾)’란 제목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구하러 갈 군사를 모집하였던 일,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전쟁시 동학군을 토벌하였던 일, 1907년 정미의병에 참여한 일이 적혀 있다.
권두 목록상의 인호총 부분은 실제 편명이 ‘인호(人戶)’로 되어 있으며, 목록에서처럼 세부 항목이 인구, 호수, 토지, 세액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앞부분에는 예전의 호구수와 토지결수, 그에 대한 부세 내역이 나오며, 뒷부분의 ‘신증’이라고 표기된 부분에 읍지 편찬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각 면별 호구수와 호세(戶稅) 액수, 토지 면적과 지세(地稅) 액수가 적혀 있다. 말미의 총계 기록에 따르면, 평산군의 총 호수는 19,223호, 총 인구는 95,970인이었다.
부구록(付舊錄) 부분에는, 예전 평산의 부세 내역과 재정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특히 많이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구읍지의 내용을 수록한 부분이지만, 그간의 변화 상황을 추가 기록한 곳들이 있어 주목된다. 예를 들어 단소(壇所: 목록상의 단사) 항목을 보면, 사단(社壇), 성황단(城隍壇) 등 고을의 기본적인 제향시설들이 1910년에 모두 철폐된 것으로 나온다. 또 평산은 황해도 지역 교통의 요지로서 역참 등의 시설이 다수 존재했는데, 발소, 지참, 역소 항목을 보면 이러한 곳들 역시 모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신증부례(新增賦例)’란 제목으로 19세기 말 이래의 부세제도 변화가 개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읍지는 1920년대 황해도 평산 지역의 다양한 면모를 상세히 기록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평산의 지리와 역사, 문화적 환경, 사회경제적 상황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으며, 19세기 이래 근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이 지역에 어떠한 변화들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 내용상으로는 근대적 제도와 시설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체제상으로 본 읍지는 조선시대 전통 읍지의 체제를 계승하고 있다. 또한 향교나 유교적 가치를 체현한 인물들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수록한 점 등에서, 평산의 유교전통과 문화유산을 지켜가고자 하는 편찬자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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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사항
참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솔, 1996), 『국역 여지도서』(디자인흐름, 2009), 『한국지리지총서: 읍지(황해도편)』(아세아문화사, 1985),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집필자 김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