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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 (奎12722)
 1.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 경위



《세종실록(世宗實錄)》은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의 재위 기간(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7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이며, 모두 163권 15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전조 고려 의 실록을 수장했으므로 그 사고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명실상부한 조선의 사고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이 완성된 태종 13년 3월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이때의 기록에는 실록봉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경중 춘추관사고에 수장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이후 수차례에 걸쳐 수정되면서 세종년간에 이르서야 완성된다. 세종 13년 3월에 ‘태종실록(太宗實錄)’이 완성되고 난 후 4월에서야 사고수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때에는 춘추관사고본 외 정본 1건만을 필사하였는데 검열 김문기를 보내어 선초의 삼조 실록을 모두 충주사고에 봉인하도록 하였다. 이 충주사고가 조선 외사고의 시초가 된다 이때의 충주사고는 ‘고려실록(高麗實錄)’을 수장해둔 開川寺의 사고인지 아니면 성내에 신춘한 것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세종 21년 기록에는 민가와 이웃해 있어 화재의 우려가 있다고 했으므로 이미 개천사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의 실록을 봉안할 사고는 성내에 따로 신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의 실록은 봉안할 사고는 성내에 따로 신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의 실록은 세종 22년까지는 충주 개천사 사고에 수장되었다가 ‘고려사(高麗史)’찬수를 위해 경중으로 수송되었고 찬수가 끝난 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그가 승하한 지 2년 1개월 뒤인 문종 2년(1452) 3월 2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단종 2년(1454) 3월에 완성되었는데, 2년 1개월이 걸린 것이다. 당시 편찬의 총재관(總裁官)은 처음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였으나, 단종 원년(1453)에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황보인•김종서가 피살되자, 최후의 감수는 정인지가 홀로 담당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간에 걸친 사료(史料)가 매우 방대하였으므로, 그 실록 편찬에는 육방(六房)으로 나누어 분담 찬수케 하였다. 육방의 책임 찬수관은 처음에 허후•김조•박중림(朴仲林)•이계전(李季甸)•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이었으나, 문종 2년 6월에 박중림이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파견되어, 최항(崔恒)이 이에 대신하였다. 편수관으로는 박팽년(朴彭年)•어효첨(魚孝瞻)•하위지(河緯地)•성삼문(成三問) 등 4인, 기주관(記注官)으로는 신숙주(申叔舟)•양성지(梁誠之)•이석형(李石亨)•유성원(柳誠源) 등 23인, 기사관(記事官)으로는 김명중(金命中)•서강(徐岡)•이계전(李季專) 등 25인과 기타 많은 사자관(寫字官)이 이에 종사하였다. 총 1백 63권의 방대한 실록이 단시일에 완성된 것은 정인지•성삼문•최항•박팽년•신숙주•양성지 등 당시 뛰어난 일류 명사 60여 명이 이에 종사하여 분담 편찬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그 분량이 방대하므로, 처음에는 한 벌만 등초(謄抄)하여 춘추관에 두었다. 세조 12년(1466)에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 이미 편찬된 《문종실록(文宗實錄)》과 아울러 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하여, 성종 3년(1472)에 완료되었다. 실록이 활자로 인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인출한 것은 3부로서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세 사고(史庫)에 각 1부씩 봉안(奉安)하고, 초본은 춘추관에 보관케 하였다. 그런데 임진 왜란으로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다른 사고에 수장하였던 실록이 모두 병화에 없어지고, 오직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만이 간신히 남게 되었다. 이를 선조 말년부터 다시 인쇄하여, 재난(災難)을 피할 수 있는 태백산•오대산•묘향산, 또는 적상산(赤裳山)•마니산 등에 설치된 여러 사고에 한 벌씩 봉안케 하였다.

세종때에 이르러 사관의 직제는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기간동안간의 직제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조선초기 사관의 직제는 고려말의 직제에 의거하면서도 여러차례의 개편과정을 거쳐서야 정비되어 갔다. 신왕조개창(新王朝開倉) 당초인 태조 1년 7월에 의장•법제를 전적으로 전조고사에 따르면서 문치백관의 제를 정할 때, 교명(敎命)•국사(國史) 등을 논의하는 일을 과장하는 기관으로 예문춘추관을 그대로 두고 직제를 정하였으니, 그 직명•인원수•품직 및 겸직여부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



직명 인원수 품직•겸직여부
임관사(臨館事) 1 시중이상(侍中已上), (兼)
대학사(大學士) 2 정이품(正二品)
지관사(知館事) 2 자헌이상(資憲已上)
학사(學士) 2 종이품(從二品)
동지관사(同知館事) 2 가선이상(嘉善已上), (兼)
충편수관(充編修官) 2 사품이상(四品已上)
겸편수관(兼編修官) 2 사품이상(四品已上)
응교(應敎) 1 오품(五品), (兼)
공봉관(供奉官) 2 정칠품(正七品)
수찬관(修撰官) 2 정팔품(正八品)
직관(直館) 4 정구품(正九品)
서사(書史) 4 팔품거관(八品去官)


세종 16년 당시까지에는 육승지•좌우사간•의정부사인•사연관(2인)•팔한림(八翰林) 등이 이미 사관을 겸해왔으나 그때까지도 태조즉위초부터 거듭 규제되어온 경외대소오문(京外大小衙門)의 공보책무가 거의 이행되지 않아서 겸사직체계를 일부 확대 시켜 각기 소속관아에 따라 사관으로서의 직장을 분담시켰다. 즉 이조•병조•예조•경연•사헌부•승정원에 대하여 집의이하(執義以下) 낭청(郎廳) 중의 1인에게 각기 사직(史職)을 겸대(兼帶)케하고 경연관은 서연의 예에 따라 2인으로서 겸대시켜서, 각기 직당에 따라 진퇴인물(進退人物)•군기(軍機)•예악(禮樂)•관내밀시(關內密侍)•백관규찰(百官糾察)•사대관계(事大關係)에 관한 일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 위에 따로 직사(職事)가 없는 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직관(直館) 각 1원으로 사관을 겸대시켜 매일 춘추관에 출사하여 겸대사직자(兼帶史職者)의 기사와 아울러 대소아문(大小衙門)의 공보문서를 점검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포쇄하고 점검하였다. 부정기적으로 행한 점검은 실록의 봉안(奉安), 고출(故出), 이안(移安), 취래(取來), 봉심(奉審), 염랍(染蠟), 개궤(改櫃), 개사(改絲), 개장(改裝), 騰出과 실록각(實錄閣)의 수개(修改)를 할 때 포쇄하면서 행해졌다. 이 중 고출이란 조정에 대사가 있을 때 전례를 참고하여 시행하기 위해 실록이나 서적에서 필요한 기사를 초록해 오도록 사관을 파견한 것을 말한다. 조선전기 실록 고출이 빈번했던 이유는 체제의 정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세종 13년 3월에 《태종실록》36권이 완성되었는데 세종은 이미 선왕인 태종도 실록을 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 변계량의 논의를 좇아 보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실록을 친히 보지 않은 선대의 제왕은 없었다고 하면서 《태종실록》의 편찬이 끝났으니 한번 보고자 하였다. 이때 우의정 맹사성, 제학 윤유 등이 다시 고칠 것도 없을 것이며, 전하가 만일 본다면 후세임금이 이를 본받아 고칠 것이며,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므로 불가함을 아뢰었기 때문에 친히 볼 수 없었다.(세종실록 세종 13년 3월 갑신, 권 51, 책 30



2. 《세종실록(世宗實錄)》의 내용



《세종실록(世宗實錄)》은 모두 1백 63권으로 내용이 매우 방대하다. 세종은 32년에 걸친 재위 기간을 통하여, 정치•외교•군사•경제•제도•예악(禮樂)의 정비와 각종 문물의 창제(創製)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가 수록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다른 왕들의 실록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편년체의 기사 외에 많은 《지(志)》가 첨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1부터 권127까지는 다른 실록과 같이 매일의 기사를 일기체로 엮었는데, 여기에도 풍부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는 권128로부터 권135까지가 《오례(五禮)》며, 권136으로부터 권147까지가 《악보(樂譜)》〈악보(樂譜)•악장(樂章)〉, 권148로부터 권155까지가 《지리지(地理志)》, 그리고, 권156으로부터 권163까지가 《칠정산(七政算)―내•외편―》 그리고 말미에 부록으로 편사관(編史官)의 명단이 실려 있다.

《오례》는 길(吉)•흉(凶)•군(軍)•빈(賓)•가례(嘉禮)에 관한 예식 의주(禮式儀注)로 성종 때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모본인 바, 정척(鄭陟)•변효문(卞孝文) 등이 주가 되어 찬술한 것이다. 《악보》는 주로 세종 시대에 완성된 아악을 집성한 것으로, 유사눌(柳思訥)•정인지(鄭麟趾)•박연(朴堧)•정양(鄭穰)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지》는 세종이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합적 지리지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그 궤를 같이 한 것으로서, 내용을 보다 상밀(詳密)히 한 것이다. 그리고 《칠정산》 내외편은 천문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천문(天文)•역법(曆法)을 재정리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년체 기록 중에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세종은 즉위 후 4년(1422)까지는 상왕으로 있었던 태종(太宗)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태종(太宗)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하였다. 세종대에는 개국공신 세력이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학자적 관료들과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다.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다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꾸면서 정치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익년에는 세자(世子 :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토록 함으로써 정치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해졌다. 세종 전반기에는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을 펼쳤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표현이었다.

세종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하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勘)•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이 비교적 안정되게 국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안정된 정치체제와 분위기가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집현전을 통해 양성된 인재들은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은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정비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여기에는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관료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기관에서 오랜 연구와 검토를 거쳐 국가의 의례인 오례(五禮 :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를 비롯한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었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세종대의 문화 사업은 방대한 편찬사업을 수반하여 15세기 민족문화의 정수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대의 편찬물의 중요한 것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孝行錄》(세종 10), 農事直說》(세종 11), 《三綱行實》(세종 14), 《八道地理志》(세종 14), 《無寃錄註解》《鄕藥集成方》(세종15), 《資治通鑑訓義》(세종 16), 《韓柳文註釋》(세종 20), 《國語補正》(세종 22), 《明皇誡鑑》(세종 23), 《絲綸全集》(세종 24), 《杜詩諸家註釋》(세종 25), 《韻會諺譯》, 《五禮儀註》, 《七政算內外篇》(세종 26), 《治平要覽》(세종 27), 《龍飛御天歌》,《龍飛御天歌註解》《諸家曆象集》《醫方類聚》《訓民正音》(세종 28), 《東國正韻》(세종 29), 《四書諺解》《高麗史》(세종 30) 등이다.

이들 중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 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창제를 지휘하였고, 집현전의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과학과 기술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세종 14년부터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과 석축 간의대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는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규모로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이 그것이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여 24년에 완성하였고, ≪칠정산외편≫도 이순지•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다. 세종 27년에는 천문•역법의 총정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가역상집≫이 이순지에 의해 편찬되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었고,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세종 13년과 28년에는 도량형제도를 확정하여 후에 ≪경국대전≫에 수록하였다. 인쇄술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로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어 완구(碗口),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瑟)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직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를 전면 개주(改鑄)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간행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세종대에는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는데,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農事直說≫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을 계몽하고 권장하였다. 의약서로는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우리 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이 된다.

세종은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였다.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해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관해서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다. 그리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 확립하였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연구와 시험을 거듭해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 대의 큰 업적이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였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반면 세종 8년에는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초기에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말년에는 매우 심취하게 되었다. 이는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이 불교에 심취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세종은 말년에 유학자 관료들과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을 벌였다. 이는 유교가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수요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 대에는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 사업을 추진하였다.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였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로 설치하게 하였다.

세종의 시호는 장헌(莊憲), 존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英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3. 악보



세종실록(世宗實錄)은 모두 16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권제136에서 권제147까지가 악보이며, 이 악보를 세종실록악보라 약칭하고 있다. 세종실록악보에 수록된 음악들은 아악(雅樂)과 신악(新樂)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 아악은 주희(朱熹)의 의례시악(儀禮詩樂)과

임우(林宇)의 석전악보(釋奠樂譜)에 근거하여 지었으며, 신악은 전해져 내려오는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에 의거하여 제작하였다. 악보 편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유사눌(柳思訥)이 작성한 아악보(雅樂譜) 서(序)에 실려 있다. 세종실록악보 중 조회(朝會)와 제사(祭祀)에 사용되던 아악은 12곡 26편의 황종궁(黃種宮)으로 전체 312수의 악곡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 종묘, 사직, 석전 등의 국가 제향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정된 악장을 갖추고 있어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 등의 신악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대업은 조종(祖宗)의 무공을, 보태평은 조종의 문덕을 각기 노래한 무악(舞樂)이다.

또 세종실록 29년 6월의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에 치화평보(致和平譜)가 5권, 취풍형보(醉豊亨譜)와 여민악보(與民樂譜)가 각각 2권, 정대업보(定大業譜)와 보태평보(保太平譜)가 각각 1권, 발상보(發祥譜)가 1권, 그리고 시용속악보(時用俗樂譜)가 1권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시용속악보(時用俗樂譜)에는 환환곡(桓桓曲)을 비롯하여, 여러 시용(時用) 속악(俗樂)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세종실록악보에는 이중에서 봉황음(鳳凰吟)과 만전춘(滿殿春) 2곡만이 권제147에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악보가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위상은 매우 높다. 그 이유는 현재 실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악보라는 점, 전래되는 고취악과 향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롭게 창안된 신악이라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를 통해 조선전기와 그 이전의 음악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봉래의, 즉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등은 모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가악(歌樂)이었으므로 그 실제 연주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또한 세종실록악보는 중국에 남아있는 고악보(古樂譜)들과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발전된 악보임을 알 수 있다. 《정간보(井間譜)》로 대표되는 세종실록악보는 새롭게 창안한 《정》(井)이란 형식을 통해 음의 길이를 규정할 수 있었고 음고와 가사, 장고와 장단 등을 함께 기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행마다 32개의 《정》(井)으로 구성하여, 음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2행에서 6행의 체제에 이르는 여러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음악의 기록, 연주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정간보라는 총보(總譜)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동양음악사에서 중요한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서양에 비해 약 200년 정도의 늦기는 하지만 동양 최초의 유량 악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오례의



≪세종실록≫ 부록의 일부로 조선초기 국가의례(國家儀禮)를 집대성한 책이다. 모두 8책 분량으로 ≪세종실록≫의 권128~135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악보(樂譜, 권136~147), 지리지(地理志, 권148~155), 칠정산 (七政算, 권156~163)과 함께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의 일부인 지(志)의 형태로 되어있다. 실록과 같은 편년체 연대기에는 일반적으로 지를 붙이지 않지만, ≪세종실록≫(36책)과 《세조실록》(2책)에만 독특하게 붙어 있다. 지(志)를 붙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정인지 허후 등의 건의로 인한 것이었다. 세종대에 강기(綱紀)를 제정하고 예(禮)악(樂)을 만든 것이 매우 많아서 편년체의 서술방식으로 모두 포괄하여 정리하려면 실록이 번거롭고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에 지(志)를 따로 설정해 참고하는 데 편리하게 하자는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세종실록≫은 권1부터 권127까지는 편년체로 되어 있고, 권128~163까지 36책은 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만 유독 이렇게 많은 분량의 지를 붙이게 된 것은 이 시기에 창제하고 정리한 제도 문물과 문화적 업적이 워낙 다대하고 폭 넓어 편년체 서술에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악보나 도판(圖版)처럼 일반 서적의 형태로 편집하여 간행하기 어려운 요소도 있었다. 실제로 지 8책은 ≪세종실록≫의 본문과 달리 모두 활자가 아닌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오례(五禮)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역대 왕조에서 핵심이 되는 국가의례로,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 흉례(凶禮)로 구성된다. 《오례》란 용어는 서경(書經)이나 주례(周禮)와 같은 고전에도 나오지만, 국가의례로서 체계화된 것은 한 대(漢代) 이후이며, 당(唐) 현종(玄宗) 20년(732)에 편찬된 《개원례(開元禮)》로 집대성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반에 중국식의 제사(祭祀) 의례가 도입되었으나, 오례 체제가 확립된 것은 고려 예종(재위 1105-1122) 때로 생각된다. 그것은 1234년에 최윤의(崔允儀) 등이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으로 재정리하였고, 그 일부가 《고려사》 오례지(五禮志)에 전한다. 조선 왕조는 태종 때(1410)부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국가 의례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는데, 오례의 길례(吉禮) 부분은 이 때 허조(許稠) 등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세종 때는 여기에 박차를 가하여 정척(鄭陟)•변효문(卞孝文) 등으로 하여금 흉례,군례,빈례,가례 부분을 편찬하여 오례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는 1451(문종 1)에 책으로 편찬되었고,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이 완성되었을 때 부록으로 붙이게 되었다. 태종~세종 대의 의례 정비와 오례의 편찬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시행하던 전례(典禮)와 고사(故事)를 기초로 하고, 당(唐), 송(宋),명(明)의 제도를 참작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상정고금예문》과 주자(朱子)의 《가례(家禮)》, 명(明)의 《홍무예제(洪武禮制)》《대명집례(大明集禮)》 ≪통전(通典)≫ 등을 주로 참고하였고, 기타 유교 고전들과 국초 이래 시행되었던 여러 의궤(儀軌)들을 참조하였다. 《세종실록》오례는 훗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1451년에 편찬된 본 오례는 미흡한 점이 많았으므로, 세조 때 강희맹(姜希孟) 등에게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도식(圖式)을 따로 붙여 편찬하게 하여 《경국대전》에 부록으로 붙이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1474년(성종 5)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세종실록》 오례는 각 예식의 진행 절차를 규정한 의식(儀式)과 그 예식에 필요한 인원•물품•장비 및 시행 일시,장소 등을 규정한 서례(序例)로 구성되는데, 각 예(禮) 마다 서례를 앞에, 의식을 뒤에 배치하여 합편하였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는 의식(儀式)을 의주(儀註)라 하여 이들만을 수록하였고(총 8권), 서례(序例)는 따로 모아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라는 별책(총 5권)으로 편찬하였다. 두 책에 수록된 의식/의주와 서례의 조항 수(아래 표)를 보면 대략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구분 서례/의식 세종실록 오례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서례 14 20
의식 35 56
가례(嘉禮) 서례 11 9
의식 44 50
빈례(賓禮) 서례 3 3
의식 6 6
군례(軍禮) 서례 3(缺 1) 4
의식 8 7
흉례(凶禮) 서례 7 13
의식 46 91
합계   177 259


비록 체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표를 보면 세종 이후 성종 초까지 25년 사이에 오례에서 증보된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길례와 흉례 부분에서 증보가 많고, 가례•빈례•군례는 변화가 많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는 조선초기 국가의례를 정비하기 위한 노력의 결산이며 세종 조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국조오례의》의 편찬에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왕조 500년의 국가 전례에 모범이 되었다. 오례의 각 권별 수록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권(권 128) 서문, 길례 서례

제2권(권 129) 길례 의식(儀式, 親祭社稷~•享宗廟攝事儀)

제3권(권 130) 길례 의식(四時及臘親享宗廟儀~久雨榮祭國門儀)

제4권(권 131) 길례 의식(親享先農儀~享司寒儀)

제5권(권 132) 가례 서례와 의식(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使臣及外官迎敎書儀)

제6권(권 133) 가례 의식(納妃儀~鄕飮酒儀)

빈례 서례와 의식(宴朝廷使儀~禮曹宴隣國儀)

군례 서례와 의식(射于射壇儀~鄕射儀)

제7권(권 134) 흉례 서례와 의식

제8권(권 135) 흉례 의식(遣奠儀~•文昭殿儀)



5. 칠정산



《칠정산》 내외편은 천문에 관한 것으로서, 칠정은 일월(日月) 오성(五星)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나라의 천문(天文)·역법(曆法)도 세종 시대에 정리되고 대성(大成)된 것이니, 세종은 일찍이 천문 관측에 있어서도 힘을 기울여 일관(日官)을 명하여, 삼각산(三角山) 봉두(峯頭)에서 일식(日食)· 월식(月食)을 관측케 하고, 때로는 백두산·한라산·마니산(摩尼山)에 윤사웅(尹士雄) 등을 보내어, 북극(北極)의 고도(高度)를 측정케 하였으며, 다시 제종(諸種)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우리나라의 역수(曆數)에 맞도록 한 것이 이 《칠정산》 내외편인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당(唐)의 선명력(宣明曆)과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을 써 왔으나, 추보(推步)의 차가 심하므로, 세종은 그것의 이정(釐正)을 꾀하고,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원(元)의 수시 역법(授時曆法)과 명(明)의 통궤 역법(通軌曆法)을 연구 참작케 하여, 이 《칠정산》 내편을 저작케 하였는바, 제1 역일(曆日), 제2 태양(太陽), 제3 태음(太陰), 제4 중성(中星), 제5 교식(交食), 제6 오성(五星), 제7 사여성(四餘星)의 순서이며, 권수(卷首)에 천행 제율(天行諸率)·일행 제율(日行諸率)· 월행 제율(月行諸率)을 붙였다.

세종 대왕은 이와 같이 하여, 내편(內篇)을 찬(撰)한 뒤에 또 회회 역법(回回曆法)을 얻었으므로,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사이에 생기는 역법상의 차류(差謬)를 고정(考正)케 하여, 본 외편(外篇)을 만든 것이니, 그 내용은 제1 태양(太陽), 제2 태음(太陰), 제3 교식(交食), 제4 오성(五星), 제5 태음 오성 능범(太陰五星凌犯)으로 되어 있다. 이 《칠정산》 내외편은 이미 세종의 재위시에 편저(編著)된 것인바, 그것이 실록에까지 실린 것을 보면, 당시 예(禮)·악(樂)·지리(地理)와 더불어 천문(天文)· 역산(曆算)이 얼마나 중요시되었던가도 짐작이 되는 바이며, 그때 흠경각(欽敬閣)을 중심으로 각종의 의상(儀象)·의기(儀器) 등이 나타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6. 지리지



조선왕조 창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세종7년(1425)에 경상도지리지가 편찬되기 시작하여 세종 14년(1432)에는 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이 지리지는 단종 2년(1454)에 약간의 손질을 거쳐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다. 그 후 성종 12년(1481)에는 조선 초기 지리지 편찬의 완결편인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지리지의 편찬사업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를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상호 긴밀한 연관 속에서 추진되었다. 세종은 집권 후 여러 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리지 편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변계량에게 지리지 편찬을 지시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일정한 지리지 편찬의 규정을 정하여 8도에 지시하고 8도에서는 그 규정에 의거하여 지리지를 편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보고된 8도의 지리지를 참고하여 세종 14년(1432)에 전국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이 전국지리지는 수결본 상태로 춘추관에 보관되다가 단종 2년(1454)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거쳐 그 부록으로 수록된다. 이 지리지가 흔히 말하는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세종실록이 편찬된 단종 2년(1454)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세종실록 지리지 내용을 검토해보면 이 지리지가 세종때 작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태조부터 태종때까지의 사실들은 모두 묘호를 써서 적고 있지만 세종때의 사항들은 세종이라는 묘호를 쓰지 않고 모두 "금상(今上)"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리지가 단종때 편찬되었다면 세종 치세기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도 당연히 "세종"이라는 묘호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세종 치세 기간의 사실이라도 세종 14년 이후의 달라진 내용들은 "금상(今上)"이라는 연대를 쓰지 않고 "세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세종실록 지리지가 세종14년에 일단 편찬이 되어 춘추관에 보관하다가 단종때 보완 편찬하면서 세종14년 이후의 사실들은 보완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서문에 의하면 세종 14년에 이 지리서를 편찬하였지만 주군의 연혁은 변화가 많고 또 특별히 양계인 함경도와 평안도의 연혁은 신설된 주군이 많기 때문에 세종 14년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의 뒷부분에 이들 주군을 덧붙여서 편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경도 기사 중 경원 등의 6진과 삼수군 그리고 평안도의 자성•무창 등의 새로 신설된 군현들은 그 도(道)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군현들의 연혁을 설명할 때 "금상" 대신 "세종"이라는 묘호를 쓰고 있다. 이는 이들 군현에 관한 사항은 세종실록을 편찬하던 단종 2년에 추가로 편찬되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편년체인 세종실록에는 지리지를 비롯하여 몇 편의 "지(志)"가 부록으로 수록된 것은 당시 실록의 편찬자였던 정인지 등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는 허후와 함께 김요•박중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에 제정된 악보오례의•칠정산내외편•지리지 등을 실록의 부록으로 실을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정인지 등에 의하면 세종대에는 제례작악(制禮作樂)한 것이 많으므로 이를 실록에 별도로 "지"로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은 편년체이므로 부록으로 "지"를 수록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도한성부를 비롯하여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평안•함길도 등 8도에 소속되어 있는 328개 군현에 관한 각종 인문지리적인 내용을 파악하여 국가에서 편찬한 최초의 전국 규모의 지리서이다. 특히 호구•군정•공부•전결•토산•조운 등 조세 수취에 필요한 경제 사항과 명산•대천•군영•역관•성곽•목장•봉수•관방 등 관방에 관한 사항과 성씨•인물 등 주민들의 신분구성에 관한 사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독특한 기후 조건을 가진 지역은 별도로 적었고, 각 지방의 민속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강원도 이천군조에 "귀신을 숭상한다.", 황해도 봉산군조에서는 "백성들이 양잠을 업으로 한다.", 전라도 강진현조에서는 "어렵을 좋아한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세종실록 지리지는 세종대에 있어서 국가의 통치 자료를 수집하고 파악하기 위하여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의 새로운 정치•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고,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조선왕조의 통치가 만세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이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