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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 (奎12726)
 1.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 경위와 편수관



《예종실록(睿宗實錄)》은 조선 제8대 국왕 예종의 재위 기간(1468 9월 ~ 1469년 11월) 약 1년 3개월간의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예종양도대왕실록(睿宗襄悼大王實錄)》이며, 모두 8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예종실록(睿宗實錄)》 말미에는 “성화(成化) 6년 경인(庚寅) 2월에 명령을 받아 사초(史草)를 출고하여 7년 12월에 이르러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을 끝내고, 편찬하기 시작하여 8년 임진(壬辰) 5월에 끝마쳤다.”고 기록이 있다. 이 기사로 미루어 《예종실록(睿宗實錄)》은 예종이 승하한 다음해인 성화 6년, 즉 성종 원년(1470) 2월에 춘추관(春秋館)에서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아 성종 2년(1471) 12월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을 마친 후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3년(1472) 5월에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종 원년(1469) 4월 1일(갑인)에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기 위하여 춘추관 안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최항(崔恒)을 감춘추관사로,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를 지춘추관사로, 김수령(金壽寧)•정난종(鄭蘭宗)•예승석(芮承錫)을 동지춘추관사로 임명하고, 기타 수많은 수찬관(修撰官)•편수관(編修官)•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을 임명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예종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해 11월에 승하하였다. 성종이 즉위한 다음 계속 이를 편찬하여, 3년 후에 완료하고, 계속하여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반년 후에 완성하였다는 것이,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관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관과 거의 같다.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성종은 편찬관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최항(崔恒)에게는 각각 안장을 구비한 말 한 필을 하사하고,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김수령(金壽寧)•정난종(鄭蘭宗) •김지경(金之慶)에게는 각기 말 한 필을 하사하고, 예승석 예승석(芮承錫)•정효상(鄭孝常)•유지•유권•고태정(高台鼎)•임사홍(任士洪)•성숙•노공필(盧公弼)•정휘(鄭徽)•유자분(柳自汾)•김윤종(金潤宗)•최숙정(崔淑精)•김극검(金克儉)•최경지(崔敬止)•김신(金新)에게 각각 망아지 한 필을 하사하였다. 박시형(朴始亨)•노금(盧昑)•남계당(南季堂)•남윤종(南潤宗)•김직손(金直孫)•이박(李博)에게 각각 향표리(鄕表裡) 한 벌씩 하사하고, 김유(金紐)•김중연(金仲演)•안침(安琛)•채수(蔡壽)•김윤(金崙)•손창(孫昌)•김예원(金禮源)•김종(金悰)•김미(金楣)•안진생(安晉生)•정이교(鄭以僑)•박처륜(朴處倫)•손비장(孫比長)•박시형(朴時衡)•최철관(崔哲寬)•강거효(姜居孝) 등은 각각 한 계급씩 올려 주었다. 장책(粧冊)한 서원(書員) 공시은(貢始殷)•김득중(金得中)과 서리(書吏) 이선지(李先枝)•이귀림(李貴林) 등은 취재(取才)하여 우선적으로 서용하게 하였다.

《예종실록(睿宗實錄)》은 편찬한 후 《세종실록(世宗實錄)》•《문종실록(文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과 함께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2. 《예종실록(睿宗實錄)》의 내용



예종(睿宗: 1450~1469)의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 초자(初字)는 평보(平甫)이며,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둘째 아들이다. 세조가 즉위한 후 해양 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세조 3년(1457) 9월에 그의 형 의경세자(懿敬世子: 德宗)가 사망한 뒤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세조 14년(1468) 9월 7일 세조가 승하하기 하루 전날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 경험이 있었고, 세조의 정치행태를 답습하였다. 그도 세조처럼 언관(言官)들에게 강경하여, 실록에 언관에 대한 좌천•파직 등의 기사가 많다. 예종은 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여 많은 업적이 없었고, 세조대의 훈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세조 대 정치의 연장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예종은 즉위 초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한명회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구치관(具致寬) 등의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또한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뒤에서 수렴청정하였다. 그해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였고,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처형하였다.

원년(1469) 3월에는 삼포(三浦)에서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6월에 〈천하도 天下圖〉를 완성하였고, 7월에는 ≪무정보감 武定寶鑑≫을 편찬하였다. 9월에는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세조대에 시작한 ≪경국대전≫을 찬진하였으나 미진한 것을 보완하느라고 반포를 보지 못한채 승하하였다. 시호는 양도(襄悼), 존호는 흠문성무의인소효(欽文聖武懿仁昭孝), 묘호는 예종(睿宗)이며, 능호는 창릉(昌陵)으로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신도읍 용두리(龍頭里)에 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