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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 (奎12727)
 1.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성종실록(成宗實錄)》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재위 기간(1469년 11월 ~ 1494년 12월)의 25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이며, 모두 297권 150책으로 활판 인쇄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은 제14권 성종 3년 정월부터 기사의 다소에 상관없이 반드시 1개월을 1권으로 편철하였기 때문에 권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은 성종의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4월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 등의 건의로 춘추관(春秋館) 안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편찬 도중인 1498년(연산군 4)에 김일손(金馹孫)이 실록청에 제출한 사초(史草) 가운데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과 〈화술주시 和述酒詩〉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신진사림들이 큰 화를 당하기도 했으나 실록 편찬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어 이듬해인 1499년 3월에 인쇄가 완료되고 4사고(史庫)에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에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과 우의정 성준(成俊)이 총재관(總裁官)으로, 지관사(知館事) 이극돈(李克敦)이하 동지관사 안침(安琛)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堂上)으로, 편수관 표연말(表沿沫) 이하 74인은 모두 실록청 낭청(郎廳)으로 참여하였다. 총재관은 의정(議政) 중 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므로 처음에는 신승선이 총재관이 되어 편찬을 총 지휘하다가 뒤에 성준(成俊)이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1년 4월에는 사관의 직제에 변화가 있었는데 예문관에 다음과 같이 6품이상관이 대거 증설되면서 모두 지제교(知製敎)도 맡고 경연, 춘추관직을 겸하게 되었다.

부제학(1인, 정삼품당상관)

직제학(1인, 정삼품)

전한(1인, 종삼품)

응교(1인, 정사품)

부응교(1인, 종사품)

교리(2인, 정오품)

부교리(2인, 종오품)

수찬(3인, 정육품)

부수찬(3인, 종육품)

그러나 성종 9년 3월에 이르러 겸직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어 봉교이하는 경연직을 겸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예문관에 증설되었던 부제학 이상 부수찬까지의 전원이 지제교, 경연, 춘추관직을 겸대한 대로 홍문관의 實御로 이차되고, 봉교이하는 그대로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두되 예문관에는 그 위의 전임장관이 없으므로 홍문관의 응교 2인 중 1인으로 하여금 직제학(도승지겸)과 같이 봉교이하관을 통솔케 하였다.(성종실록 권 90, 성종 9년 3월 병진일)

사초와 실록은 임금과 대신들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견제장치였다. 사초도 실록도 국왕을 위주로 기록되었지만 국왕의 위업과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전기에는 실록의 고출이 수차례에 걸쳐 있었는데 이는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기 위해 전례를 삼기위한 것이기도 했다. 성종년간에도 실록의 고출은 수차례 걸쳐 있었다.

성종 즉위년 12월 춘추관에 명해 장순빈을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또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수빈(粹嬪)의 칭호도 추숭할 것에 대해 옛날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다. 춘추관에 서 상고하여 아뢰었는데 춘추관에 명한 것으로 보아 실록을 고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장순빈은 황후로 추존하여 예종을 부묘할 때 합부하기로 하였고 의경세자도 왕으로 추존하고 수빈(粹嬪)에게는 휘호를 올렸다. 성종 5년 12월 춘추관에 전지하여 조종이래 휼형(恤刑)의 교서와 의옥(疑獄)의 결안(決案)을 실록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원래 외방 형옥의 청단(聽斷)은 모두 감사에게 위임하였는데도 이날 아침 경연에서 조관을 보내어 다시 심리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만약 조관이 다시 심리하면 소요만 일어나게 되므로 좋은 방책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옛날 정인지(鄭麟趾)가 계청하여 역대 휼형(恤刑)의 교서를 초록해 중외에 반포한 바 세종년간의 교서는 사대부의 집에 있으므로 그 후 조종조의 휼형에 대한 일을 실록에서 초록해 반포할 것을 우부승지 김영견(金永堅)이 청했기 때문이다. 성종 6년 2월에는 우승지 유승에게 실록을 고출하라 명하였다. 그 이유는 시평 여신 전례에 사헌부에 상고할 일이 있으면 각 관청의 문적을 가져다 보았는데 근래 이조에서 의망단자를 보내오지 않아 증빙할 자료가 없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은 영사 홍윤성에게 물으니 세종말년에 이미 비밀로 하고 누설하지 말라는 전지가 있었다고 아뢰니 실록을 상고하게 한 것이다. 성종 7년의 기록에 유승이 제2차 왕자의 난의 주모자인 박포 자손의 감면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춘추관에 있을 때 실록을 보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상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 8년 10월 왕은 양성지를 자헌대부(資憲大夫)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당령 김제신 등이 양성지를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이에 당령 김제신 등이 양성지를 대사헌에 임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양성지는 탐오(貪汚)하고 사림에에서 오랫동안 시끄럽게 떠들었는데 문제의 인물을 더구나 사헌부의 수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뜻이다. 사헌부에서 공론에 의해 《말발굽에 편자를 더하였다》란 물의가 있었다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은 양서지를 자헌대부(資憲大夫) 남원군으로 삼고 이계손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그래도 물의가 계속되자 결국 일주일 후 임금은 실록 상고하라고 춘추관에 전지하였다. 이어 형조정랑 이인석에게 양성지의 일을 물었다. 이인석은 예종 1년 민수의 사초개서사건에 관련되어 곤장 100대에 본향에 충군되었다가 해제되어 이때 형조정랑에 있었다. 이인석은 역시 이런 물의가 있었다고 대답했고, 이숭원도 당시 승지로 있었는데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춘추관에서 상고해보니 당시 실록에는 능단이나 편자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 양서지는 애매헤게 비방을 받은 것으로 대속은 대신을 탄핵하다가 죄책을 당한다면 언로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양쪽을 그대로 두웠다. 성종 9년 11월 정근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자 사헌부에서 물의가 있었다. 정근은 세조년간에 요사스러운 꿈이야기를 바쳐 벼슬에 오르기를 꾀하였고 이에 간사스러운 인물이라고 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을 갑자기 요직에 임명하는 것은 성조의 부끄러움이라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승정원에 명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상고하게 한 바 정근이 해인사에서 불경을 인쇄한 것만 기록되고 꿈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결국 실록을 상고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황해도 감사 자리가 오래 비어있었으므로 예조참의 이맹현(李孟賢)을 정근 대신 보냈다. 일년 후 성종은 다시 정근을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불가하다고 아뢰자 성종은 실록을 상고하여도 꿈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기용한 것인데 불가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의 반대가 심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정근의 직을 바꾸어 형조참의에 제수 하였다. 정근은 대간의 논박을 당하자 진술하는데 대간에 관계된 말을 잘못하여 결국 파직되었다.

성종 12년 4월 명에서 사신을 보내 중관의 고명(誥命)을 보내오자 고명(誥命)을 친히 받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사신이 고명을 내전에 두고 나간 후 중궁이 명부를 이끌고 예를 행하고 여관이 전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연전에 정동 등이 양전에 황제의 하사품을 전할 때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태종조의 실록을 살펴 보았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친수여부를 알 수 없었다. 이때는 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폐한 후 계비 윤씨(繼妃 尹氏)의 고명을 받기 위함이었다. 대벽(大辟)을 처결하는 일을 실록에서 상고해서 아뢰자 선왕의 고사에 따라 복을 벗을 때까지 사형수는 기다려 다시 계청하여 처결하게 하였다. 아 앞서 4월에 대왕대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제에 관해 아뢰었는데 그 중 대벽의 죄는 3년 뒤에 처결하면 옥사에 관련된 자가 많을 것인데 지체된 옥사를 어찌 처리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왕은 졸기 후에는 재살(宰殺)을 금하지 않으니 대벽일지라도 처결해야 마당하 하면서 예조와 홍문관에 명해 상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漕船)의 회항이 늦어져 기일에 못대자 죄받을까 두려워 중도에서 왜적에게 약탈당하고 6명이 살해되었다고 거짓 보고해서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미혹한 죄 즉 망언과 허위로 대벽으로 정해진 전라도 예선천호 河習과 鄭復唐만은 3년후 처결하되 그때 다시 아뢰게 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끝에 부기되어 있는 편찬에 관계한 전후 춘추관 관원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관사(領館事): 영의정 신승선(愼承善)

감관사(監館事): 우의정 성준(成俊)

지관사(知館事): 이극돈(李克墩), 박건(朴健), 유순(柳洵), 홍귀달(洪貴達), 노공필(盧公弼), 윤효손(尹孝孫)

동지관사(同知館事): 조익정(趙益貞), 김수동(金壽童), 이육(李陸), 권건(權健), 김극검(金克儉), 신종호(申從護), 김제신(金悌臣), 허침(許琛), 안침(安琛)

편수관(編修官): 표연말(表沿沫), 권주(權柱), 윤희손(尹喜孫), 이균(李均), 이거, 강경서, 이승건(李承楗), 양희지(楊熙止), 이달선(李達善), 이유청(李惟淸), 이의무(李宜茂), 김봉, 김전(金詮), 이수공(李守恭), 안당, 이계복(李繼福), 이세영(李世英), 장순손(張順孫), 남궁찬(南宮燦), 박열(朴說), 손번(孫蕃), 허즙, 남세주(南世周), 최부(崔溥), 남재담(南再聃), 김삼준(金三俊), 이의손(李懿孫)

기주관(記注官): 이전, 유순정(柳順汀), 임유겸(任由謙), 정광필(鄭光弼), 이과(李顆), 김감(金勘), 성세정(成世貞), 이효문(李孝文), 손주(孫澍), 권균(權鈞)

기사관(記事官): 김천령(金千齡), 이효돈(李孝敦), 유희저(柳希渚), 권달수(權達手), 기저, 권민수(權敏手), 윤은보(尹殷輔), 조치우(曹致虞), 송흠(宋欽), 이유녕(李幼寧), 남곤(南袞), 이관(李寬), 신세건(辛世健), 신징(申澄), 강덕유(姜德裕), 정승조(鄭承祖), 이희순(李希舜), 한세환(韓世桓), 심순문(沈順門), 성중엄(成重淹), 정희량(鄭希良), 권오기(權五紀), 성희철(成希哲), 이행(李荇), 강징, 고세창(高世昌), 김배(金焙), 성윤조(成允祖), 이자(李滋), 신공제(申公濟), 김관(金寬), 김세필(金世弼), 이사공(李思恭), 문근(文瑾), 하계증(河繼曾), 서후(徐厚), 김숭조(金崇祖)



2. 《성종실록(成宗實錄)》의 내용



성종의 이름은 혈(娎)이며, 세조의 손자로 의경세자(懿敬世子: 追尊 德宗)와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에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고쳤다. 1469년 11월 예종이 재위한 지 1년만에 훙서하자 조모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그를 지명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하였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있었으나 어렸고, 또 성종의 형 월산군(月山君)도 있었으나 병약하였기 때문에 성종이 지명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종의 즉위 초기에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원로 대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최항(崔恒)•조석문(曹錫文)•홍윤성(洪允成)•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 등이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보필하였다.

성종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弘文館)을 창설하고 어진 선비를 이에 임명하여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고금의 치란과 시정의 득실을 연구하였다. 그는 세조 대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하여 조선 왕조 5백 년간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또 삼국 시대 이래로 숭상해 오던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유교국가의 토대를 확고히 하였다. 이 때문에 성종 대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사림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이를 표방하는 삼사(三司)의 언론활동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 대에는 민족 문화에 관한 서적을 많이 편찬하였는데, 역사에 관한 서적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지리에 관한 서적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에 관한 서적으로 《동문선(東文選)》등을 편찬하였다. 성종은 크게 문화를 일으키고, 국방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리 나라의 평안도 함경도를 자주 침입하는 야인(野人: 女眞族)을 정벌하고, 남방의 왜인(倭人)에 대해서는 삼포(三浦)를 중심으로 한 무역을 증진하여 내치 외교에 큰 업적을 세워 조선 왕조의 전정 시기를 이루었다.

성종의 시호는 강정(康靖), 존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이고, 묘효는 성종(成宗)이며,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현재의 서울 강남구(江南區) 삼성동(三成洞)에에 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