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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 (奎12728)
 1.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는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의 재위 기간(1494년 12월 ~ 1506년 9월) 1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모두 63권 4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일괄해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반정(反正)으로 폐위되었으므로 묘호(廟號)가 없고, 그 실록도 노산군(魯山君: 단종)•광해군(光海君)의 예와 같이 일기라고 칭하였으나, 체제나 내용 면에서 다른 실록과 별로 다름이 없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중종 1) 11월에 시작되었다. 폐위된 왕의 실록 편찬이므로 일기수찬(日記修撰)이라는 이름으로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므로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후임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감춘추관사가 되어 편찬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연산군 때 은총을 받은 인물을 교체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건의로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이에 따라 편찬 책임자로서 총재관(摠裁官) 성희안(成希顔) 이하 도청당상(都廳堂上) 2인, 각방당상(各房堂上) 4인, 색승지(色承旨) 1인이 다시 임명되어 본격적인 편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는 대개 한 달을 한 권으로 하고 기사가 적은 달은 합하여 한 권으로 하였으나, 6-7개월 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즉위한 달의 기사는 9장에 불과하나 이것을 제1권으로 한 것만이 예외이다. 제1권의 초두에는 각항 1자씩을 낮춘 7항의 글로 연산군에 관하여 집약적으로 총설되어 있다. 그 밖에는 일반 실록의 체제와 같이 문단을 바꾸지 않고 날이 바뀌거나 기사가 바뀔 때마다 그 앞에 ○표를 붙였다. 사관(史官)의 평[史論]은 후기의 실록과 같이 별항으로 1자 낮추어 적지 않고 해당 기사의 말미에 붙여 기록하였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여러 차례에 걸친 연산군의 시정기(時政記)가 조사명령으로 직필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관이 정청(政廳)•경연(經筵) 등에 참여하지 못하여 사초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반정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위축된 상황하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 의 충격으로 역대 사관들이 사초(史草)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고, 편찬관들도 후환을 두려워해 직을 사양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연산군일기≫는 1509년(중종 4) 9월에 완성되었고, 세초(洗草) 등 실록봉안(實錄奉安)에 따른 제반의식을 간략히 치른 뒤 외사고(外史庫)에 봉안되었다. 그 편찬 범례는 후일 ≪광해군일기≫ 편찬에 준용되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역시 실록의 고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연산군 3년 조정이 간신들의 가자문제(加資問題)로 시끄러웠다. 이는 연산군 2년 7월 공신의 적장인 임사홍에게 한 자급을 올려주라고 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년이 되도록 이 문제로 들끓었으며 이듬해 5월 복직된 대간이 아뢰기를 전에 임사홍이 성종에게 대간은 망국소인이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성종은 내가 있을 동안에 임사홍을 다시는 등용하지 않겠다는 전교를 내렸다고 하였다. 5월에 뎐산군은 누가 그 전교를 들었느냐고 묻자 대간은 편찬이 거의 완성단계인 《성종실록》을 상고하면 임사홍의 죄악이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뢰었다. 이에 왕은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고 이틀 후 실록청에서 임사홍의 죄명과 대간이 전후에 논계한 것을 써서 보고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간이 임사홍의 가자를 고칠 것을 여러차례 청하였으나 왕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임사홍은 결국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인 연산군 4년 7월 11일에 발생되었다.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전라감사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국상 때 저지를 불미스러운 일을 사초에 올린 것을 훈구파의 이극돈이 본 것이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를 참혹하게 박해하게 된다. 임사홍과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고 문제삼았다. 이어 유자광과 합세하여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하여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이 교사한 것으로 결론 지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 조종조에 없던 일을 많이 기록하였는데 다른 사람도 이와 같이 할까 두렵다 하면서 실록을 보고자 하였다. 이에 동부승지 이세영,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은 왕이 실록을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었고 왕은 실록청 당상에게 지금 서계한 제신들의 사초에 세조년간에 간여된 일에 누락이 있을 것으로 보이니 자세히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결국 7월 28일에 김종직(金宗直), 권오복(權五福), 김일손(金馹孫), 권경유(權景裕)의 사초를 불태우게 하였다. 이어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능지처참시켰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신진사류가 귀양가게 되었고 파면되거나 좌천되었다. 주모자인 이극돈도 수사관으로서의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고 유자광의 위세는 더욱 당당하게 되었다. 무오사화 이후에 연산군은 역대 어느 군주보다 사관을 탄압하였다. 시정기를 만들 대 무오사화에 연류된 사관들의 사초는 이용하지 말도록 명했다. 또 사관이 집안에 보관한 가장사초를 모두 제출하게 하고 이후로는 가장사초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또 군주의 과실은 아예 사초에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 입시사관은 자신이 총해하는 신하로만 임명했으며 연산군대에 조선의 사관과 사초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연산군 10년 왕이 춘추관에 명해 성종년간에 폐비에게 사약을 내린 전말을 상고하게 하였다. 이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훈구사핌파가 화를 입은 갑자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연산군은 생모에 관한 사실을 임사홍의 밀고로 알게 된 후 생모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고치고 제헌황후(濟獻皇后)로 추존하고 성종묘에 배사하였다. 또한 윤씨 폐위와 사사를 주장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찾아내 죄를 주게 된ㄷ. 4월 초하루에는 춘추관에서 성고한 폐비사약시말단자(廢妃賜藥始末單子)를 내려주면서 도승지, 의정부, 춘추관 당상과 예문관원에게 이 일에 관계된 사람은 일의 종류에 따라 뽑아 아뢰라고 명하였다. 또한 폐비할 때 의논한 재상도 부관참시하기 위해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이틀 후 실록을 상고할 때 폐비를 간한 대간도 함께 상고하게 하였다.

이에 이 일에 관련되어 다시 논의된 사람은 권숙의(權淑儀), 엄숙의(嚴淑儀), 정숙원(鄭淑媛), 노공필(盧公弼), 성준(成俊)이었다. 이 폐비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폐비의 일이 누락되지 않도록 또다시 상세히 상고하게 하였다. 이는 임사홍이 무오사화때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연산군비 신(愼)씨의 오빠 신수관과 손잡고 훈구세력과 무오사화 때 남은 신진사류를 일소하기 위해 꾸민 옥사였다. 이로서 성종 대 양성된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는 침체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 또한 중종반정 후 회릉(懷陵)은 다시 회묘(懷墓)로 강봉된다.

연산군대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가 발단이 되어 대재적으로 일났던 유혈숙청사건인 사화를 통해 무너졌던 이른바 춘추필법에 입각한 역사서술 방식은 중종대에 이르러 위축된 사관의 기록활동, 즉 사초 작성을 통해 다시 복구되기 시작한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찬에 참여한 수찬관•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의 명단은 여타 실록과 달리 부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기사관으로 참여했던 권벌(權橃)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일기세초지도 日記洗草之圖≫에 의해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성희안(成希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성세명(成世明), 신용개(申用漑), 장순손(張順孫), 정광필(鄭光弼), 김전(金詮), 박열(朴說)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조계상(曹繼商), 이유청(李惟淸), 김봉, 성세순(成世純), 손주(孫澍), 임유겸(任由謙), 남곤(南袞), 권홍(權弘)

수찬관(修撰官): 강경서, 이세인(李世仁), 한세환(韓世桓), 경세창(慶世昌), 최숙생(崔淑生)

편수관(編修官): 유희저(柳希渚), 김근사(金謹思), 안팽수(安彭壽), 윤은보(尹殷輔), 이희맹(李希孟), 황필, 김숭조(金崇祖), 김준손(金駿孫), 김철문(金綴文), 강중진(康仲珍), 이위(李偉), 윤세호(尹世豪), 김극픽, 윤경(尹耕), 조순(趙舜), 허굉, 김세필(金世弼), 이행(李荇), 윤희인(尹希仁), 김안국(金安國), 신상, 안처성(安處誠), 유운(柳雲), 어득강(魚得江)

기주관(記注官):이현보(李賢輔), 이사균(李思鈞), 성운(成雲), 권복(權福), 신엄(申儼), 홍언필(洪彦弼), 정충량(鄭忠樑)

기사관(記事官): 이말(李抹), 성세창(成世昌), 유관(柳灌), 김영(金瑛), 윤인경(尹仁鏡), 이희증(李希曾), 김흠조(金欽祖), 문관(文瓘), 권벌, 윤지형(尹止衡), 김희수(金希壽), 정웅(鄭熊), 소세량(蘇世良), 임추(任樞), 최중연(崔重演), 반석평(潘碩枰)



2.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체제와 내용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이름은 융(㦕)이며, 성종(成宗)과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맏아들이다.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12월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는 무오사화(戊午士禍) 로 인한 후유증 및 연산군(燕山君) 의 사관에 대한 탄압으로 대다수의 자료가 유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한 면이 많다. 그러나 성종 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기성세력과 신진세력과의 갈등, 또 궁중 세력과 부중(府中) 세력과의 충돌, 무오(戊午)•갑자(甲子)의 양대 사화(士禍), 그리고 연산군의 호화 방종(豪華放縱)한 생활 기록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다른 실록과 달리 사론(史論)이 극히 적어 25개 정도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왕 및 왕에게 총애를 받은 사람들의 비행에 대한 것이다.

기사 내용에 있어서는 무오사화(戊午士禍) 가 일어난 왕 4년 이전까지는 왕도정치•도승(度僧) 및 사원전(寺院田)•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 문제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년 이후 갑자사화가 일어난 왕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傳敎)가 반반을 차지하고, 그 뒤 폐위까지는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治罪)와 연락(宴樂)에 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대명관계는 극히 소략하나 야인(野人)의 회유•정토(征討)문제와 왜인(倭人)의 토산물 진봉(進封)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왕의 시문 및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개인에 대한 서술에서 사림파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에 대해서는 간략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총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을 하는 동시에 사론(史論)의 형태를 취해 많은 비판을 첨가하고 있다.



3. 《연산군일기》 총서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 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