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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 (奎12730)
 1.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인종실록(仁宗實錄)》은 조선 제12대 국왕이었던 인종의 원년부터 잔여 재위 기간(1544년 1월 ~ 7월)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실록(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實錄)》이며, 모두 2권 1책으로 활판 간행되었다. 인종의 즉위년(1543년 11월 16일 ~12월 말일)까지의 기사는 《중종실록(中宗實錄)》제105권에 합편되어 있다.

인종은 재위 기간이 7개월 반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왕의 실록인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착수하지 못하였고, 다음 명종이 즉위한 후에도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즉시 착수하지 못하였다. 명종 원년(1546) 가을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을 동시에 편찬하게 되었다. 이때는 우의정 정순붕(鄭順朋)이 실록청 총재관(摠裁官),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 등이 실록청 당상관(堂上官)에 임명되어 되어 편찬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명종 2년(1547) 12월에 우의정 정순붕이 총재관을 사직하고 좌의정 이기(李芑)가 대신 실록청의 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을 마치고 《인종실록(仁宗實錄)》을 편찬할 때는 좌의정 심연원(沈連源)이 실무를 주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편찬 과정에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명종 5년(1550) 9월에 이르러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이 동시에 완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유일하게 사론(史論)이 실린 실록이다. 동아시아의 어떤 실록에도 사론은 실려 있지 않다. 청실록, 명실록, 일본실록, 월남실록, 등 어떤 실록에도 사론은 없다. 사관의 직접적인 역사비평인 사론에서 비난 받는 다는 것은 조선시대 누구라도 기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전임사관들이 집에서 별도로 작성한 가장사초야 말로 사론의 주원천이었다. 전임사관들은 입시사초와 가장사초를 작성했으며 입시사초는 국정이 논의되는 장소에 직접 참여하여 논의 내용을 적은 뒤에 그날 춘추관에 내는 사초이다. 다라서 입시사초에 사론을 작성하는 일은 불가능 했다.

반면 가장사초는 집에 돌아와 별도로 작성하는 사초로서 입시차소를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온 사관은 자신의 기억을 더드어 다시 사초를 작성했다. 이때 작성하는 사초에는 자신의 판단과 평가를 담을 수 있었다. 대신 가장사초는 춘추관에 제출하지 않고 사관이 자신의 집에 비밀리에 보관했다. 실록청이 개설되면 사관은 가장사초를 제출했다. 이 가장사오체 실린 역사적 평가가 실록의 사론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실록은 본문, 세주, 사론 등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역사 사실을 연월일로 서술하여 전형적인 편년체로 기록되었다. 이중에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세주(細註)로 처리해씅며, 세주는 본문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한 기록으로서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썼다. 그리고 사론은 통상 행을 바꾸고 하칸 낮추어 《사신왈(史臣曰)로 시작된다.

《인종실록(仁宗實錄)》 까지는 사롬이 본문 중에 특정사실에 연이어서 서술되었으며 이 경우는 본문을 읽어야만 사론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명종실록(明宗實錄)》부터는 본문과 구별하여 행을 바꾸고 한 칸을 낮추어 사론을 쓰기 시작했다. 사론이 별행으로 처리된 것은 그만큼 사론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의마한다. 사론이 중요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역사의식이 고조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초에 실명을 적게되는 이른바 《사초실명제》에 대한 문제는 인종년간에도 여전한 문제로 남아있았다. 인종 1년 1월 중종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초를 거두어 들이는 과정에서 가장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에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춘추관을 두어 시정을 갖추어 적되 춘추관에 보관하는 시정기에도 사관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직필을 위한 것인데 개인 집에 수장된 사초에 성명을 쓰게하니 사서를 만들게 된 본의에 크게 어긋나므로 이름을 쓰지 말게 하여 사필을 잡은 자가 제 뜻을 펼 수 있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춘추관당상과 의논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났으나 춘추관의 당상관이 전례를 고증하여 아뢰겠다고 한 회답이 없어 다시 분부하였다.

2월말에는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윤인경(尹仁鏡)이 실록각을 열고 가장사초(家藏史草)에 사관의 이름을 쓴 전례를 고증하기를 청하자 왕은 윤허하였다. 이에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 민사도(閔思道) 등이 차자를 올려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근거가 없고 쓰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으므로 전례를 고증할 필요가 없으며 역사가 역사답게 되려면 공변되어야 하며 역사가 공변되지 못한다면 역사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하였다. 또한 사관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름을 쓰지 않으면 변변치 못한 사람이 자기의 호오에 따라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쓸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후에 직필하는 사람이 공평한 마음으로 밝게 살펴서 취사하므로 기록한 자의 시비에만 좌우되지 않음을 말하였다. 또한 사각을 쉽사리 여닫게 되면 실록을 비밀히 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고 사람마다 역사를 볼 수 있는 꼬투리를 만들게 되니 삼가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왕은 사고를 여닫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고 사초에 여러 세대에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전교 하였다.

《인종실록(仁宗實錄)》은 원년(1545) 정월에 시작하여 동년 7월 1일에 끝났으므로, 만 6개월간의 기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실록의 분량도 단지 2권에 그치게 되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종사한 춘추관 관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심연원(沈連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윤개(尹漑), 상진(尙震), 신광한(申光漢), 김광준(金光準), 임권(任權)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박수량(朴守良), 송세형(宋世珩), 남세건(南世健), 김광철(金光轍), 유진동(柳辰仝), 권찬(權纘), 조사수(趙士秀), 심광언(沈光彦), 이명(李蓂), 한두(韓㞳)

편수관(編修官): 홍담(洪曇), 박충원(朴忠元), 김충열(金忠烈), 김반천(金半千), 성세장(成世章), 박공량(朴公亮), 김개(金鎧), 유강(兪絳), 이무강(李無疆), 윤옥(尹玉), 윤부(尹釜), 정유(鄭裕), 이사필(李士弼), 노경린(盧慶麟)

기주관(記注官): 박영준(朴永俊), 박대립(朴大立), 권벽(權擘)

기사관(記事官): 이억상(李億祥), 신여종(申汝悰), 심수경(沈守慶), 허엽(許曄), 황준량(黃俊良), 임여(任呂), 김적(金適), 이언충(李彦忠), 이중경(李重慶), 이광진(李光軫), 고경허(高景虛), 기대항(奇大恒), 김규, 황호(黃祜), 김질충(金質忠), 목첨(睦詹), 이지행(李之行), 강섬(姜暹), 이명(李銘)



2. 《인종실록(仁宗實錄)》의 내용



인종(仁宗: 1515~1545)의 휘(諱)는 이호(李峼)이며, 중종(中宗)과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장자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고, 25년 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중종 39년(1544) 11월 15일에 중종이 승하(昇遐)하자 다음날 즉위(卽位)하였다. 이듬해(1545) 7월 1일에 승하했으므로 재위(在位) 기간이 7개월 반밖에 되지 않았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治績)은 기록할 만한 것이 적다. 본 실록에 나타난 행적(行迹)과 즉위 이후의 치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종은 자질이 뛰어나 3세 때에 글을 배웠고, 8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행동이 예절에 맞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 범준(范浚)의 심잠(心箴)과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 《시경(詩經)》의 칠월장(七月章) 등 심신의 수양과 정치에 도움이 되는 성현의 격언(格言)을 써서 좌우에 두고서 반드시 준행하였다. 부왕인 중종을 섬기면서 효도와 정성을 다하였다.

인종은 원년 정월에 오래 비워두었던 영의정에 홍언필을, 좌의정에 윤인경을, 우의정에 이기를, 좌찬성에 성세창을, 우찬성에 이언적(李彦迪)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은 이기가 정승의 자리에 적합하지 못함을 여러번 논계(論啓)하여, 결국 이기는 우의정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후에 윤인경을 영의정에, 유관을 좌의정에, 성세창을 우의정에, 이언적을 좌찬성에, 유인숙(柳仁淑)을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당시의 권신(權臣)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와 결탁하여 왕대비 윤씨에게 신임을 얻어 좌찬성에 올랐다. 이 때문에 이기는 사림과 원한을 맺게 되었고, 결국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야기하게 되었다.

인종은 사관이 사초(史草)를 쓸 때 자기 이름을 기재하지 않는 옛날의 규정을 회복시켰다. 이는 사간원(司諫院)에서 올린 건의를 따른 것으로 사관들의 직필과 공론을 보장하고 역사를 통한 권선징악의 기능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원년 3월에 성균관 진사 박근(朴謹) 등의 상소를 필두로 대간(臺諫)•시종신(侍從臣)•경연관(經筵官) 등이 여러번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복직을 청하였다. 그때마다 인종은 《우리 부왕께서 조광조는 죄가 없다고만 말씀했을 뿐이고 끝내 복직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뜻이 있었을 것이니 이런 이유로써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결정을 미루다가, 병환이 위중하게 되자 대신들에게 유교(遺敎)하여 그를 복직시키고,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당한 사람들도 복직시켰다.

인종은 중종의 초상(初喪) 때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5개월 동안 소리를 내어 곡하며 죽만 먹을 뿐이고 소금과 장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병세가 더하였으나, 대신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인종실록(仁宗實錄)》에는 국왕의 집상(執喪) 관계 기사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545년 중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 왕의 병세가 더하여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6월 29일에 대신들에게 아우인 경원대군(慶原大君: 明宗)에게 전위(傳位)하고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는 유명을 내리고 31세의 나이로 훙서(薨逝)하였다.

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인자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인종(仁宗)이란 묘호(廟號)를 얻었다. 시호는 영정(榮靖), 존호(諡號)는 헌문의무장숙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이며,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