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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 (奎12732)
 1.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실록(宣祖實錄)》은 선조(宣祖) 재위 기간(1567년, 명종 22년 7월∼1608년, 선조 41년 1월) 41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며, 모두 221권 116책으로 활판 간행 간행되었다. 선조의 묘호(廟號)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판심에는 《선종대왕실록(宣宗大王實錄)》이라고 인각되어 있다. 광해군 8년(1616) 8월에 묘호를 선조(宣祖)로 개정하면서 실록의 표제도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라고 하게 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 7월 1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8년(1616) 11월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서인(西人)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편찬을 하였으나, 뒤에는 북인(北人)인 기자헌(奇自獻)이 담당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그 대부분이 선조 25년(1592년) 임진 왜란(壬辰倭亂) 이후 16년간의 기사(記事)로 되어 있으며, 전체 221권 중 195권에 달한다. 반면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까지 약 25년간의 기사는 모두 26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시정기〉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공공 기록과 사초(史草)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료의 보완을 위한 논의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또한 《선조실록(宣祖實錄)》이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후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의 편찬이 시작되어 효종 8년에 완성되었다.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의 발발로 다른 실록은 소실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만이 재난을 면하게 되자 그 상실에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선조가 6월에는 의주까지 피난하였다가 26년 8월 해주로 옮기면서 전쟁은 소강상태가 된다. 10월에서야 환도가 가능하였고 1년 후인 27년 9월부터 실록의 부본필사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해주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는 유일본인 구 전주사고본 실록의 봉안을 위해 해주산성에 사각을 설치하는 것을 계획하였는데, 비변사에서는 오히려 이 무사한 때에 겸춘추 등에게 명해 소책으로 몇건을 필사하게 하여 각처에 분장하면 의외의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실록을 가벼이 쉽게 필사한다는 자체의 미안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므로 후일을 기다릴 것이고, 지금은 용의주도하게 수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는 임진왜란의 재난을 면한 전주사고본 실록의 복본을 제작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보여주는 기록이지만 선조가 당시로는 불가능하므로 후일을 기다리고자 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또 1년 후인 28년 9월에 춘추관에서 계하여 해주에 있는 실록의 봉안처는 다른 건물과 연접하여 의외의 환란이 없을 수가 없으므로 연접된 건물을 철거하고 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실록부본의 필사는 긴급한 일이므로 늦출 수 없고 일은 매우 많아 수일내로 용이하게 끝낼 수 없으므로, 봄을 기다려 시간이 길어지면 춘추관원을 많이 보내 일시에 날을 계산하여 필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청하였다. 이에 명년 봄에 필사하도록 하자는 대신들의 의견에 왕은 따랐다.

그 사이 해주에 있는 실록의 임시 봉안처는 좁고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경사와 가깝고 편리하면서도 안전한 강화로 이안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어 이들 실록은 28년 11월 강화로 이안되었다. 선조 30년 2월에 기사관 이유홍(李惟弘)이 계하여 급히 문신 약간명을 보내 구 전주사고본 실록 외에 삼건을 필사하게 하여 일건은 금강산에, 일건은 묘향산에 장치하면 물, 불과 도적에 대한 대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바 있으나 영의정이 돌아오면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이에 13일 후 춘추관에서는 실록필사를 위해 겸춘추 10명을 강화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관원이 너무 많으면 지탱할 비용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5명만 보내 급히 필사하고 천천히 사세를 보아 더 보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실록필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임진왜란 후 최조에는 인출보다 필사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30년 4월 정유재란으로 실록은 다시 묘향산으로 이안되었고, 조정에서는 여전히 실록필사를 계속하려는 의지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실제 논의도 여러 번 있었다. 34년 정월에는 사헌부에서 병란으로 말미암아 관서의 옛 절에 임시로 안치된 실록의 수직에 소흘하게 되어 불의의 변이 있으면 수습할 방도가 없게 되는데, 다만 임시관원만이 수직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본관의 관원이 번갈아 수직하고 급속 필사하여 분장함으로써 영구히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이와 같이 영변에 임시로 안치하고서도 역시 필사하는 논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침 정유재란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실록을 묘향산에 여전히 수장시킴은 매우 미안한 일이므로 필사하여 분장하자는 여론과 대간의 청에 따르기로 하였다. 아울러 필사할 때에 영변부 내에 따로 한 곳을 택해 이봉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므로 객사로 이봉하여 거행하도록 하였다. 종전에 겸춘추 10명을 강화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관원이 너무 많으면 지탱할 비용이 넉넉지 못하므로 5명만 보내 급히 필사하고 천천히 사세를 보아 더 보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실록필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임지왜란 후 최초에는 인출보다는 필사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임진왜란 전 실록의 고출에 대한 사례는 선조초기에도 발견된다. 선조 2년 1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황(李滉)이 실록과 의궤를 참고해서 문소전(文昭殿)에 태조를 동향으로 모실 것과 소목(昭穆)의 위치를 바로 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다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대신 이준경(李俊慶) 등이 중론에 따라 명종을 부묘(祔廟)할 때 인종까지 함께 부묘(祔廟)할 것을 청해 윤허를 받았었다. 그러나 본전을 봉심하는 과정에서 사당의 간수를 증축해야만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준경(李俊慶)이 다시 의논하여 종전대로 부묘(祔廟)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중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이에 이황이 문소전(文昭殿) 소목(昭穆)의 위치를 조정할 것을 청한 것이었으나 거부된 것이다. 이어 2월에는 사관의 관원과 여러 행신들이 춘추관에 들어가《세종실록(世宗實錄)》을 고출하여 문소전의 의궤를 고증하고 정원에 나가 묘도와 차자를 올렸다. 그 내용은 인종과 명종은 같은 소목으로서 인종을 부묘할 때 세조는 인종과 명종에게 고조가 되고 不䃾泣이기 때문에 지위의 수는 여섯이 되어야 하므로 본침본전(本寢本殿)내에 타당한 변례를 의논해 처리해야 했었다. 그런데 부당한 이의를 제기하여 별묘에 들였는데 당시 명종의 성지에 인종은 뒷날 마땅히 부입해야 한다고 하교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 2년에 이르러서도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발발 이전까지 실록을 고출한 목적, 시기, 열람인물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왕, 년, 월 대상서적(對象書籍) 가부(可否) 열람인물(閱覽人物) 고출목적(故出目的)
태조 2.1 고려의 사초 열람(閱覽) 국왕(國王) 국왕과 대신의 비방(誹謗)
태조 4.6 태조의 사초 不能 국왕(國王)
태조 7.5. 태조의 사초 不能 국왕(國王)
태조 7.6 태조의 사초 末詳 국왕(國王)
태종 4.4 고려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윤관의 동여진 격파
태종 4.12 고려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고려 관제
태종 태조실록 不能 국왕(國王)
세종 13.3 태종실록 不能 국왕(國王) 태종실록(太宗實錄) 신찬(新撰)
세종 13.7 고려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윤관의 사적
세종 20.3 태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태종의 태조실록 열람
세종 20.9 실록과 사초 열람(閱覽) 국왕(國王) 헌릉비문 1,2차 왕자의 난
세종 28.8. 고려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요에서 세자 면복 사여
세종 28.11 태조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용비가 침입
세종 31.2 고려실록, 사초 열람(閱覽) 사관(史官) 서초 개서
세조 9.3.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세조 9.4.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어제 시문
세조 12.(윤)3.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유전서 편찬
세조 13. 10.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북정록 편찬
세조 14. 8.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어제 시문
예종 1. 4. 실록, 사초 열람(閱覽) 국왕(國王) 계유년 정란
예종 1. 4. 사초 열람(閱覽) 사관(史官) 사초 개서
예종 1. 9 실록 末詳 사관(史官) 공정왕의 칭종
성종 즉. 12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세자빈, 세자의 추숭
성종 5. 12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휼형의 교서, 의옥의 결안
성종 6.2.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이조문서의 춘추관 송부
성종 8.10. 예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양성지의 탐오사실
성종 9.11. 세조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정읜의 요사
성종 12.4. 태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중궁 고명의 친수 여부
성종 14.8.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대벽의 처결
성종 15.1.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이천우 아들 굉의 불효
성종 15.8.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오상문과 이숙감의 사제관계
성종 15.9.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공역자에 대한 상격
성종 16.7.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조선 선현의 향교 제향
성종 17.1.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이세문의 이징옥란 참여 여부
연산군 3.5. 성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임사홍((任士洪)의 죄악
연산군 4.7. 성종사초 열람(閱覽)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연산군 10.4. 성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윤씨(尹氏) 폐비(廢妃) 사건
중종 3.1.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음가(蔭加)
중종 8.3.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소릉(昭陵) 복위(復位)
중종 13.11.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군적(軍籍) 개정(改定)
중종 31.7.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纂輯) 자료(資料)
중종 31.7. 세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대열(大閱)
중종 36.1. 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자성폐지(慈城廢止) 이유
인종 1.2. 실록 不能 사관(史官) 가장사초(家藏史草) 성명 기입 여부
선조 2.1. 세종실록 열람(閱覽) 사관(史官) 종묘(宗廟) 읍차


이를 종합하면 시기적으로는 태조년간 4회, 태종년간 3회, 세종년간 7회, 세조년간 5회, 예종년간 3회 성종년간 12회, 연산군년간 3회, 중종년간 6회, 인종년간 1회, 선조년간 1회로 모두 45회 고출하였다. 대상서적을 보면 사초가 6회, 실록 36회이며, 실록과 사초 둘 다 본 경우는 3회 였다. 이중 고려의 사초나 실록은 6회 고출하였고 조선의 사초나 실록은 39회 고출하였다. 고출한 주제는 국방 5회, 사초, 관료비행과 편찬이 각 4회, 왕비, 행정과 정변이 각 3회, 관제, 예술, 실록, 추숭, 제사가 각 2회, 왕, 외교, 상격, 문묘가 각 1회 미상 5회였다. 이 중 가장 많은 것이 국방의 5회이며, 편찬, 사초, 관료비행이 각 4회이다.

사초나 실록을 보지 못한 경우가 5회였는데 이중 왕이 보지 못한 경우가 4회이고 사관이 보지 못한 경우가 1회이다. 한편 왕이 사초나 실록을 본 경우는 3회인데 이중 1회는 고려의 실록이었다. 왕이 보지 못한 경우 태조 2회, 태종 1회, 세종 1회였으며, 왕이 본 경우는 태조 1회, 세종 1회, 예종 1회 이다. 태조와 세종은 실록 열람을 여러차례 시도하여 결국은 실록을 보게 된 것이다. 실록이나 사초의 내용이 사관 이외의 대신에게 누설되었기 때문에 사관이 화를 입은 경우는 4회였다. 당시에는 이들 사관이 화를 입었으나 시간이 지나 상황이 호전되거나 정치적 상황이 변화되어 대개 사면되었다.

사초를 작성한 사관이 화를 입은 경우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연도 사관 내용 처벌내용
태조 2년 이행(李行) 국왕과 대신 비방 삭탈관직
세종 31년 권제(權踶) 사초 개서 시호추탈
안지(安止) 사초 개서 방조 고신추탈
남수문(南秀文) 사초 개서 방조 고신추탈
예종 1년 민수(閔粹) 사초 개서 제주관노
원숙강(元叔康) 사초 개서 참형
강치성(康致誠) 사초 개서 방조 참형
이인석(李仁錫) 불고지 본향충군
최명손(崔命孫) 불고지 본향충군
연산 4년 김일손(金馹孫) 국왕 비방 능지처참
김종직(金宗直) 국왕 비방 부관참시
권오복(權五福) 국왕 비방 능지처참
권경유(權景裕) 국왕 비방 능지처참
이목(李穆) 국왕 비방 능지처참
허반(許磐) 국왕 비방 능지처참


45회의 실록 고출에 관한 기록에서 간혹 춘추관에 명해 고출하게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수장된 사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사고의 설치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고려실록을 수장한 사고는 세종22년 까지도 충주에만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수장한 사고는 태종 13년 3월에《태조실록(太祖實錄)》이 완성되어 춘추관에 수장하면서 비롯되었으며 세종 13년에 충주에 사고를 설치했고 세종 27년에 이르러서야 성주와 전주에도 사고를 설치하여 4사고제도로 확립되어 임진왜란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전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에도 수장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지방의 실록을 고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춘추관의 실록이 부실하였으므로 외방의 실록을 고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정족산사고의 실록을 빈번하게 고출한 것에 비하면 대조가 된다. 따라서 고출은 주로 춘추관에 수장되었던 실록을 고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실록을 고출한 것은 선조 26년 5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개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왕릉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倭軍)에 의해 파헤쳐지고 자궁(梓宮)이 불태워지는 변고를 당하였다. 개장하려면 마땅히 지석(誌石)과 옥책(玉冊)을 써야 하는데 이에 관한 등록(謄錄)이 산일되었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전주사고의 실록을 고출하게 하였다. 당시 실록은 정읍 내장산에 소개(疏開)되어 있었다. 이 앞서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생민이 도탄에 빠졌고 아울러 중요 문적과 사적이 훼손되어 다른 참고 서적이 거의 없었다. 이때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쳤는데 재앙이 자궁(梓宮)에까지 미쳤다고 경기좌도 관찰사가 치계하였다. 정릉(靖陵)에는 안팎 자궁(梓宮)이 모두 불타고 광중(壙中)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선조 33년 6월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가 사망하였는데 이때 복제에 대한 논란이 있어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 10년 왕이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때에 입은 복제를 고출하게 하였다. 선조는 이미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한 바 있었으나 선왕이 이미 정한 제도이므로 30일 후에 길복으로 바꾸게 하였다. 이는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임시사고의 실록에서 등서해온 내용이 30일 후에 길복으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 후인 7월에는 또 대행왕비 즉 의인왕후(懿仁王后)의 휘호절차에 대해 근거할 데가 없어 실록과 의궤를 상고해오기 위해 전주사고 실록을 봉안한 묘향산(妙香山) 임시사고로 검열(檢閱) 정암(鄭岩)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형지안은 전래되지 않는다. 8월에는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상휘호(上徽號), 시호(諡號) 및 가상시호(加上諡號)에 관한 기사를 고출해오도록 [특교(特敎)] 권태일(權泰一)과 기사관(記事官) 홍익준(洪翼俊)을 묘향산의 임시사고에 파견했다. 이때의 형지안도 전래되지 않고 있다.

선조 35년 10월 이경전(李敬殿)의 재기(再朞) 후의 제의(祭儀)를 준비하던 중 종묘에 부묘하기 전에는 종묘의 관창(祼鬯)과 희생(犠牲)을 쓸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문소전(文昭殿)의 의식을 따르는 것이 좋겠는데 난리 후 증거 삼을 만한 등록이 없어서 영변에 옮겨다 놓은 전주사고의 실록에서 휘덕전(輝德殿) 소경전(昭敬殿)의 예문을 등서해 오도록 하였다. 이에 검열(檢閱) 이민환(李民寏)을 영변에 파견하여 실록을 고출한 바 소경전(昭敬殿), 영경전(永慶殿), 휘덕전(輝德殿) 모두 재기 후의 제의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선조 36년 3월 대교 김대덕(金大德)이 영변의 임시사고에서 중전산실구규(中殿産室舊規)를 고찰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이때의 중전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人穆王后)였고 당시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았다.

선조 37년 9월에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청난공신(靑難功臣)에게 교서를 반급하기 위해 전례를 상고하였다. 당시 교서의 수가 100여축에 이르러 교서를 다 읽으려면 하루 종일 읽어도 다 못 읽을 지경이었다. 이에 실록을 고출하여 태종년간 좌명공신(佐命功臣)을 녹훈할 때의 교서양식과 같이 먼저 공적내용을 밝히고 이 같은 공으로 녹훈한다는 뜻을 총론하고 다음에 모든 훈신의 성명을 열거해서 하나의 교서로 만들기로 하였다. 따라서 녹훈교서를 반포하는 의식에서는 교서 하나만 읽으면 상을 주는 뜻이 다 들어 있게 되었다.

선조 38년 4월에는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定廳)에서 〈선원록(璿源錄)〉을 편찬하는데 회안군(懷安君)을 편찬하는데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안평대군 이용의 신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실록을 상고하는 것을 윤허 받았다. 이방간(李芳幹), 이방석(李芳碩), 이방번(李芳蕃), 이용(李瑢)은 모두 죄를 받았는데 그 경중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방번(芳蕃)은 무안군(撫安君)에 봉해졌고 방석(芳碩)도 소도군(昭悼君)에 봉해져 그 자손이 작록을 물려받고 있으나, 방간(芳幹)과 용(瑢)은 상고할 문헌이 없으니 조속히 상고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때 이용(李瑢)의 자손은 단종 2년 9월에 원방의 관노비로 영속시켰음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간(芳幹)의 신설여부(伸雪與否)는 실록에서 끝내 상고해내지 못했으므로 이용(李瑢)의 자손의 예에 의거하여 삭제해줄 것을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定廳)에서 아뢰었다. 이때 왕은 모두 사면시키고 〈선원록(璿源錄)〉에 수록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예조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용(李瑢)의 예에 따라 〈선원록(璿源錄)〉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조 18년 3월에 또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방간(芳幹)의 후손들에게 천역만 면하게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예조의 계사로 인해 원손(元孫)이 취학한 전례를 상고하라는 전교가 있어서 춘추관에서 실록을 초록하여 보고하였었다. 그런데 선조 38년 4월 다시 실록을 상고해보니 입학에 대한 조목이 세종 30년 8월에 또 있어서 별도로 기록해 바쳤다. 원손이 취학문제를 논하기 시작한 것은 3월말이었고 한 달여 여러 기록을 상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록을 초록하란 명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실록을 초록해서 보고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4월에는 춘추관에서 대신이 종묘와 궁궐중건에 대해 계사하자 왕이 국초와 성종년간에 태묘와 궁궐영건한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교와 계사를 빠짐없이 고출하되 책자로 만들어 1건은 내입하고 1건은 해당관청에 두게 하였다. 이에 국초와 성종년간 영건 때의 일을 고출했는데 영선절목은 자세하지 못했다. 명종 8년 경복궁을 수개할 때 오히려 자세히 구비된 것 같아 아울러 등서하여 올리게 하였다.

8월에는 왕세자가 부왕이 중병에서 회복된 후에 세자가 진하할 것을 청한 내용이 실록등서에 없다면서 자세히 회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겸설서(兼設書)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 인종이 동궁이었을 적의 전교와 시행을 세밀히 등서하여 들이라고 하여 왕세자가 보았던바 진하 내용이 자세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조39년 1월 대신들이 왕의 즉위 40주년을 진하할 것을 연일 복합(伏閤)하자 중국의 전례와 조종의 전례를 상고하고 시비를 침작한 다음 조용히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춘추관에서는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상고한바 상수(上壽), 칭경(稱慶), 진연(進宴) 등의 일이 분명히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진하한 일은 없고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를 시행한 일이 있기 때문에 별단자(別單子)로 서계하였다. 종종조의 전교에는 조정의 전례에 따라 진하했기 때문에란 곡절이 있어서 이를 다시 상고하라고 하였다. 이를 소급한 바 세종 때 교묘(郊廟)에 제사한 예가 있었으므로 왕에게 종묘와 사직에 고제(告祭)하고 진전(進箋), 진하(陳賀), 반교(頒敎), 반사(頒赦), 진연(進宴)을 거행할 것을 예조에서 청하였다. 왕은 진연만은 거행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과시는 실시하되 구례를 실록청에서 조사한 다음 계품하게 하였다.

5월에는 중국사신(中國使臣)을 접대한 원역(員役)의 은상(恩賞)에 관한 전례를 살피고자 하였으나 자료가 없었으므로 실록을 살필 것을 도승지가 청하였고 왕은 이를 윤허하였다.

6월에는 창릉(昌陵)을 봉심한바 왕후의 능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을 상으로 삼는 제도에 어긋나 있었다. 두 능위에 모두 사대석(莎臺石)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나머지 의물(儀物)과 제구(諸具)도 똑같아서 대왕과 왕후의 능을 구별할 수 없었다. 이를 실록에서 상고하고 아울러 창릉(昌陵)과 성서의 위치가 같은 경우를 실록에서 상고하도록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를 평상시에 원릉(園陵)의 자리를 정할 때에 모지(某地), 모구(某丘), 모산(某山), 모수(某水), 좌모방(坐某方), 향묘방(向某方) 등을 실록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 예조에서 지난번 보고에 우리나라의 산릉은 동서의 위치가 바뀐 곳이 많다고 했기 때문에 각릉에 첩보해서 회보를 기다리게 하였다.

선조 40년 1월 상수연(上壽宴)이 끝난 후 공신중삭연(公信仲朔宴)을 설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춘추관에서 충훈부(忠勳府)의 전년 중삭연을 거행하였을 때의 조항을 실록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록청에서 초출한 조목을 충훈부(忠勳府)에 보내주지 않아 일에 차질이 있었으므로 등서하여 충훈부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중삭연(仲朔宴)을 상수연(上壽宴) 때 한꺼번에 거행하라고 예조에게 명하였다. 중삭연(仲朔宴) 때 적장자(嫡長子)가 참여하는 것은 관례인데 외방에 나가있는 친공신과 그 적정자는 직책의 경중을 비변사에서 침작하여 부를 것을 정하였다. 아울러 적장자 가운데 죄를 입고 부처(付處)된 자, 고신(告身)을 빼앗기거나 영원히 서용되지 못할 사람도 참석시킬 지의 여부를 실록에서 상고할 것을 청해 윤허를 받았다.

2월에는 왕은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기를 건국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景福宮)을 지을 때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것과 술사(術士)들이 지형을 살핀 후 보고한 내용을 실록에서 상고하여 빠짐없이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때 창덕궁을 연건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4월에는 종묘를 중건하기 위해 선왕의 실록을 상고한바 특별히 묘제(廟祭)를 상의한 일은 없었다. 다만 태조년간 태묘(太廟)를 창건하였고 명종년간 문가를 중수한 기록만 있었다. 이에 예조에서 대신에게 의논한바 옛날 제도를 좇아 삼대묘제(三代墓制)를 행해야 한다거나 또는 간가(間架)만 중건해야 한다는 등 종묘제도를 개정하는 것에 대해 의논이 분분했다. 이에 조정에서 논의한다면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므로 전일의 제도에 따라 중수하게 하였다.

6월에 춘추관은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종묘제도를 상고하여 별단(別單)에 모두 기록하여 바쳤다. 그 내용에 의해 문종의 신주는 종묘의 익실(翼室)에 봉안되었고 공정왕(恭靖王)의 신주는 영녕전(永寧殿) 익실로 옮겨 봉안한 시기는 끝내 상고해내지 못하였다.

선조년간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을 편찬하기 위해 열성조의 실록을 상고한 바가 있다는 정광필(鄭光弼)의 기록은 있으나 자세한 연도는 알 수 없었다.



2.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實錄廳) 관원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이항복

도청 당상(都廳堂上)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이호민(李好閔), 유근(柳根), 이이첨(李爾瞻), 이정귀(李廷龜), 박홍구(朴弘耈), 조정(趙挺), 민몽룡(閔夢龍), 정창연(鄭昌衍), 이상의(李尙毅), 윤방(尹昉), 윤승길(尹承吉), 김신원(金信元), 박승종(朴承宗), 이시언(李時彦), 김상용(金尙容), 오억령(吳億齡), 송순(宋諄) (계 17명)

각방 당상(各房堂上)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박건(朴健), 최유원(崔有源), 정광적(鄭光績), 신식(申湜), 이수광, 박이장(朴而章), 박진원(朴震元), 정사호(鄭賜湖), 구의강(具義剛), 이성(李惺), 김시헌(金時獻), 김상준(金尙寯), 김권(金權), 최관(崔瓘), 이경함(李慶涵), 남근(南瑾), 이시발(李時發), 한덕원(韓德遠), 이필영(李必榮), 유공량(柳公亮), 이정신(李廷臣), 강홍립(姜弘立), 강첨(姜籤), 유인길(柳寅吉) (계 24명)

편수관(編修官): 윤효선(尹孝先), 정호선(丁好善), 정영국(鄭榮國), 양극선(梁克選), 김용(金涌), 정조(鄭造), 정홍익(鄭弘翼), 신경락(申景洛), 이유연(李幼淵), 이흘, 이충, 심언명(沈彦明), 윤수겸(尹守謙), 이광길(李光吉), 윤선(尹銑), 황기(黃沂), 민덕남(閔德南), 최동식(崔東式), 배대유(裵大維), 이욱(李稶), 정유번(鄭維藩), 이정험, 이심, 정입, 박정길(朴鼎吉), 한찬남(韓纘男), 김광엽(金光燁), 소광진(蘇光震), 송영구(宋英耈), 박안현(朴顔賢), 남궁경, 이준(李埈), 유석증(兪昔曾), 이수록(李綏祿), 박홍도(朴弘道), 유색(柳穡), 이현영(李顯英), 임연, 성진선(成晉善), 이정원(李挺元), 임장(任章), 이경운(李卿雲), 윤인, 정도(鄭道), 조즙, 유숙(柳潚), 이사경(李士慶), 이충양(李忠養) (계 48명)

기주관(記注官): 김류, 윤양(尹讓), 유활(柳活), 목대흠(睦大欽), 민유경(閔有慶), 유여각(柳汝恪), 홍방, 김중청(金中淸), 신의립(辛義立), 윤중삼(尹重三), 변응원(邊應垣), 이중계(李重繼), 나인, 신율(申慄), 윤경(尹絅), 남이준(南以俊), 박수서(朴守緖), 황경중(黃敬中), 박대하(朴大夏), 곽천호(郭天豪), 전식(全湜), 오익(吳翊), 고용후(高用厚), 이형원(李馨遠), 금업, 권흔(權昕), 이식립(李植立), 임석령(任碩齡), 이정, 이경직(李景稷), 허실, 이함일(李涵一), 이분(李芬), 박증현(朴曾賢), 윤안국(尹安國), 박동망(朴東望), 임건(林健), 박재, 임업, 이성록(李成祿), 김질간(金質幹), 조명욱, 이빈, 서경우(徐景雨), 이잠, 임성지(任性之), 정준(鄭遵), 최응허(崔應虛), 한옥(韓玉), 김수현(金壽賢), 정호관(丁好寬), 이후(李厚) (계 52명)

기사관(記事官): 송일(宋馹), 유여항(柳汝恒), 조유도(趙有道), 조존도(趙存道), 김극성(金克成), 손척(孫倜), 황익중(黃益中), 강홍중(姜弘重), 윤지양(尹知養), 정홍원(鄭弘遠), 홍요검(洪堯儉), 정호서(丁好恕), 김대덕(金大德), 금개(琴愷), 이덕일(李德一), 목취선(睦取善), 안경(安璥), 조익(趙翼), 박자응(朴自凝), 홍위(洪瑋), 김감(金鑑), 이성구(李聖求), 채승선(蔡承先), 송극인, 박로, 박사제(朴思齊), 이수(李邃), 이창후(李昌後), 정대해(鄭大海), 김성발(金聲發), 조정립(曺挺立), 안숙(安璹), 한인급(韓仁及), 윤민일(尹民逸), 신득연(申得淵), 이경여(李敬輿), 이숙, 채겸길(蔡謙吉), 오환(吳煥), 박여량(朴汝樑), 이경탁(李慶倬), 안응형(安應亨), 성시헌(成時憲), 한명욱, 강인(姜鱗), 이창정(李昌廷), 조찬한(趙纘韓), 이경안(李景顔), 이홍망(李弘望), 조국빈(趙國賓), 정세미(鄭世美), 박래장(朴來章), 정운호(鄭雲湖), 윤지경(尹知敬), 홍명원(洪命元), 한영(韓詠), 황덕부(黃德符), 유약, 오여벌, 김치원(金致遠), 오여은, 이윤우(李潤雨), 한화, 이강, 정광경(鄭廣敬), 홍경찬(洪敬纘), 권척(權倜), 권진기(權盡己), 윤성임(尹聖任), 남성신(南省身), 남명우(南溟羽), 이지화(李之華), 이위경(李偉卿), 이경익(李慶益), 한정국(韓定國), 한급, 조유선(趙裕善), 오익환(吳益煥), 조정생(趙挺生), 서국정(徐國禎), 김준하(金奏夏) (계 81명)



3. 《선조실록(宣祖實錄)》의 내용



선조(宣祖: 1552년∼1608년)의 이름은 연(昖), 초명은 균(鈞)으로,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563년에 죽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1567년 7월 3일 임종 때 유명(遺命)을 내려 하성군을 후계자로 즉위케 하였다.

선조의 치세에는,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정치(士林政治)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전대의 훈척정치(勳戚政治)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눠지고,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발생하였다. 선조의 즉위 초에는 구체제를 혁신하려는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간의 갈등으로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은 점차 몰락하고,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575년(선조 8)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처리 문제로 1589년(선조 22) 동인은 다시 남•북인으로 분열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는 남인이 유성룡(柳成龍)을 위시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으나, 전후 수습 과정에서 남인이 실각하고 북인이 대신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 세력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또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 등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선조는 즉위초에 학문에 정진하였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을 존숭하여 증직과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유교 서적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에게 증직하고, 사림들을 신원하는 한편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은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하였다. 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하였다.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200년간이나 숙제로 내려오던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종계(宗系)를 변무하였다. 선조 16년(1583)과 20년(1587)에는 야인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 등을 시켜 그들을 물리치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선조 23년(1590)에는 왜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 이 일어났다. 조선 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는 한편,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곧 전국에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관군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으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명의 원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선조 26년(1593) 10월에 서울로 환도하여 질서를 정비하고 전국을 수습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는 군공을 세우거나 자나 납속(納贖)을 한 자들에게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 조선후기 신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왜란 중에 궁궐이 불에 타고 귀중 도서가 소실되자 각처에 흩어진 서적들을 수집 보관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논공행상을 시행하여 호성(扈聖), 선무(宣武), 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였다. 전쟁을 마무리를 지은 후에는 전후 복구 사업(戰後復舊事業)에 힘을 기울였다.

선조는 재위 41년 되던 해(1608) 2월 1일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향년 57세. 묘호(廟號)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정하였으나 광해군 8년(1616) 8월에 선조로 개정하였다. 시호(諡號)는 소경(昭敬), 존호는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 능호(陵號)는 목릉(穆陵)이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4.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은 인조~효종 때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보완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이며, 모두 42권 8책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광해군(光海君) 때 북인인 기자헌, 이이첨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으므로 당파(黨派) 관련 서술에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다. 서인으로 지목된 이이(李珥), 성혼(成渾), 박순(朴淳), 정철(鄭澈) 및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하여는 없는 사실을 꾸며서 비방하고, 이산해(李山海), 이이첨 등 북인에 대해서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종년간의 실록 고출에 대한 다양한 사례는 조선왕조가 문치주의를 바탕으로한 유교이념을 바탕으로한 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학사상은 논리보다는 선례(先例)를 중요시 여긴다. 논리보다 선례를 중요시 여기는 상고주의(尙古主義)는 옛 것을 숭상하는 경향이다. 옛거을 숭상하기 때문에 유학에서 역사는 소중하며 현재의 논리보다 과거의 선례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유교적 사유에서는 논리성, 필연성보다 오히려 옛날의 선례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행동이나 주장을 할 때 고대의 선례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정당성은 한없이 증가된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도 선례가 없는 일이라면 설득력은 아주 줄어든다.

신하가 어떤 정책을 군주에게 주청할 때 고례와 고사를 열거할 수 있다면 이것의 설득력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군주가 신하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선례를 동원해야 한다. 때문에 조선왕조에서 능력있는 국왕은 자신이 일류 학자여야 했으며 호학군주로 평가되는 세종과 정조 같은 군주는 신하들과의 국정논의에서 선례를 충분히 동원하여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군주는 신하들이 제시하는 선례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논리보다는 선례를 중요하게 여긴 유교의식의 산물이었고 현재의 통치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후대에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도 실록은 필요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시대에 행해진 선례가 숱하게 인용되어 있으며 정책논의 중에 의견이 분분할 때는 사고에 실록을 꺼내 참고한 후 정책을 결정했다. 중종 년간에도 마찬가지의 사례들은 종종 발견된다. 실록 고출에 대한 중종년간의 다양한 사례 들은 다음가 같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 정권(北人政權)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곧바로 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잘못된 사실과 누락된 부분을 수정•보완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이다.

인조(仁祖)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 이수광(李睟光)•임숙영(任叔英) 등이 실록 수정(實錄修正)을 건의하였고, 좌의정 윤방(尹昉)도 수정을 역설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인조 19년(1641) 2월에야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의 상소로 실록 수정을 결정하고, 이식에게 이를 전담시켰다. 이식은 인조 21년(1643) 7월에 예문관 검열(檢閱) 심세정(沈世鼎)과 함께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가서 《선조실록(宣祖實錄)》 중 수정할 부분을 초출(抄出)하였다. 그리고 수정 실록청(修正實錄廳)을 설치하고 가장사초(家藏史草)와 비문(碑文), 행장(行狀), 야사(野史), 잡기(雜記) 등 자료를 수집하여 수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조 24년(1646) 정월에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록 수정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효종(孝宗) 8년(1657) 3월에 이르러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요청으로 경덕궁(慶德宮)의 승정원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육(金堉)과 윤순지(尹順之), 이일상(李一相), 채유후(蔡裕後) 등으로 하여금 사업을 계속하게 하여 그해 9월에 완성하였다.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은 1년을 1권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총 42권 8책이 되었다. 선조 즉위년부터 동 29년까지의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선조 30년부터 동 41년까지의 12권은 채유후 등이 편찬하였다.

중종 7년 11월 소릉(昭陵)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근원을 알아야 하므로 실록을 고찰하되 성종년간에도 의논이 있었으므로 이때의 일도 아울러 고찰하게 하였다. 지금껏 문종은 왕후가 없이 단위(單位)로 종묘에 향사되었기 때문에 검서관(檢書官) 소세양(蘇世讓)이 건의했고, 복위를 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8년 3월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중종 8년 3월 우의정 송일(宋軼) 등이 실록각을 열고 소릉(昭陵) 즉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호를 상고하여 아뢰었다. 소릉에 대한 추폐(追廢)의 논의는 선왕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대신의 그릇된 청에 못이기어 그리된 것임을 알고 드디어 소릉을 복위하여 국기로 하였다. 소릉의 복위는 처음 성종 9년 남효온이 상소하였으나 임사홍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다음은 연산군 1년 김일손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중종 13년 11월 말에 승정원에서 군적을 고치는 것은 대개 그해 봄에 시작하는데 이때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가을 추수 때에 시작할 것을 병조에서 청했다고 아뢰었다. 이를 위해 세조년간에 군액(軍額)을 감한 일을 명년 봄에 미리 실록을 상고하여 가을에 군적을 고칠 때 반영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중종 31년 7월 왕은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청에서 보감을 찬집할 수 있도록 실록을 상고하여 등사한 것을 찬집청으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홍무관 부제학 성륜(成倫) 등이 실록을 상고하는 것은 매우 중대하고 어려운 일인데 사고를 경소하게 개폐한다면 뒷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으므로 삼가야 한다고 아뢰었다. 곧이어 헌부, 홍문관, 간원에서도 청하였다. 왕은 폐조 때 있었던 경계할 일을 수집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록을 참고하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대신들과 상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날 실록을 상고하였으며 이로서 8월 8일 신묘일에는 성륜(成倫)이 당시에는 실록을 본 사람이 매우 많아 겸춘추(兼春秋)까지도 들어와 열람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이어 여항의 우부우부(愚夫愚婦)도 말하기를 전에 실록각을 열어 큰 화가 일어났는데 이제 실록각을 열었으니 다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하고 물의가 흉흉한데 며칠째 상고하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폐조의 일은 고영할 필요가 없다고 아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집하기 위해 실록을 상고할 때 마침 대열(大閱)에 관해 상고할 필요가 있었다. 겸해 상고한 바 세종년간에 2년 거듭 대열한 기록이 있어 초록하여 보고하였다.

중종 36년 1월 도승지 한숙이 자성(慈城)을 폐지한 이유를 《정원일기(政院日記)》에서 상고하지 못했으므로 실록을 상고할 것을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신은 《정원일기(政院日記)》는 정원에서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것이지만 실록은 정사의 잘잘못과 좋은 점관 나쁜점을 기록한 것인데 일이 있을 때마다 실록을 상고하게 된다면 페단이 끝이 없을 것이라 논하고 《정원일기(政院日記)》와 실록의 경중을 알지 못하고 애매하게 아뢴 도승지가 대단히 무식하다고 논평을 하고 있다. 이어 간원에서 실록을 상고할 필요가 없음을 아뢰어 대신 및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재상들이 상의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와같은 중종년간의 사례들은 논리보다는 선례를 중요시 여긴 결과이고 후대 사람들에게 당대인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남겨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또한 후대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실을 기록해서 남겨두어야 했고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이전의 실록 편찬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었으나, 당론(黨論)이 치열하게 일어난 이후의 실록은 편찬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당파에는 유리하게, 반대당에는 불리하게 기록되는 등 기사 내용의 공정성과 시비곡직(是非曲直)에 문제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반대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이를 수정하여 다른 실록을 편찬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이 바로 그 효시를 이루었고, 후에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과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편찬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5.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의 내용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은 전체 내용이 원본의 1/5에 지나지 않지만,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필요한 기사를 많이 보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범례에 의하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결점과 수정 보완한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1) 《선조실록(宣祖實錄)》은 명예를 훼손하고 진실을 잃은 사실이 근거도 없이 잡다할 뿐 아니라, 대개의 인명•지명•관직명 등 대체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도 착오가 많으며, 명신(名臣)들의 주소(奏疏)가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들을 보완한다.

2) 야사에서 채록하여 날짜별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은 월별로 기록하고, 해당 달도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해의 끝에 써 넣는다.

3) 먼저 강령(綱領)에 실린 사실을 기록한 다음 잡기(雜記)와 비(碑)•지(誌)•행장 순의 차례로 기록하고, 국사(國事)에 관한 것이나 다른 사람의 득실을 기록한 것을 모두 자세히 채록한다.

4) 야사나 지장(誌狀) 류는 한결같이 공론(公論)에 입각하여 간략히 사실을 기록한다.

5) 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 줄인다. 이미 확인된 사실이거나 여러 사람들이 인정한 논의는 모두 그 내력에 근거하여 기록한다.

6)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자세하고 정확히 기록된 내용은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에 싣지 않고, 단지 그 대략만 남겨두어 사건의 개요를 알게 한다.

7)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간당들이 편찬을 총괄하여 관장하면서 사실을 줄이고 덧붙이기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그들이 포창한 인물은 자기 자신 및 자기와 친밀한 몇 사람에 불과하였고, 그들이 비방한 사람들은 모두 선조대에 신임 받던 명신들이었다. 간흉들 스스로 포창하고 꾸민 부분은 역사를 기록하는 예에 의하여 얼마간의 공의(公議)를 붙여 둔다.

8) 명신의 장소(章疏) 중 시비와 관계가 깊거나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들은 모두 싣기도 하고 일부분을 뽑아서 싣기도 한다.

9) 《선조실록(宣祖實錄)》 중에서 사실을 속이고 잘못 편찬한 실상과 이제 수보(修補)하는 뜻을 차례로 언급하고 얼마간의 사론(史論)을 지어 그 말미에 붙인다.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을 날짜별로 비교 검토하면 몇 가지 수정의 취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범례에 따라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에서 수정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수정본은 원본을 보완한 기사가 많지만, 대부분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보완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주로 선조대에 당론과 관련되었던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壬辰倭亂) 에 대한 기사들이다.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김효원(金孝元)의 행적에 대한 심의겸(沈義謙)의 비판과 척신이므로 심의겸의 동생 심준겸을 이조 낭관에 임명할 수 없다는 김효원의 비판 등에 대하여 수정본에서는 그 전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허엽과 허엽을 비판하는 정철과 신응시 등에 대해 가졌던 이이(李珥)와 김우옹(金宇顒)의 우려와 조정 노력 및 전후 배경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이 모반하였다는 기축옥사에 대하여는 원본과 수정본 모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위관이었던 정철이 조작 또는 확대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수정본에서 정철이 최영경을 구원하고자 한 일을 들어 원본의 기록이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인진왜란에 대하여는 의병활동에 대한 기사 보완이 많다. 곽재우•고경명•정인홍•손인갑•김천일, 조헌•영규•유종개의 활동, 이광•윤국형의 백의종군, 김덕령과 이산겸이 무고로 하옥되었던 일 등 의병활동을 많이 보완하였다. 또한 명군(明軍)의 소극적 전술, 중국 사신의 이간질 등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도 많이 보완되어 있다.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본에서 많이 보완되었다. 이순신의 승전, 이순신과 원균의 틈이 생긴 이유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이 원균의 편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이순신 하옥되었다거나, 원균이 이순신의 수군제도를 변경하여 패배했다는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수정본은 원본의 사론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사론을 붙인 것이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한 비판 사론에서 그러한 것이 많다. 원본과 수정본에서 평가의 일치를 본 인물은 홍여순(洪汝諄: 小北)과 이충(李冲) 두 사람인데, 둘 다 비판적인 내용이다. 원본에서는 높이 평가했는데, 수정본에서 비판한 인물은 이이첨(李爾瞻)•기자헌(奇自獻)•박홍구(朴弘耈)•정인홍(鄭仁弘)•이희득(李希得)•심종도(沈宗道) 등으로 이들은 모두 대북 인사들이다. 원본에서 비난하였으나 수정본에서 칭찬한 인물들은 한준겸(韓浚謙) 같은 유교(遺敎) 7신, 이덕형(李德馨)•이현영(李顯英) 같이 당색을 떠나 중망을 받던 인물은 물론,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인 성혼(成渾)•이항복(李恒福)•윤두수(尹斗壽)•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 및 신진인 김상헌(金尙憲) 등이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