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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海君 (奎12734)
 1.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태백산본》



1-1.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 제15대 국왕이었던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재위(在位) 15년 2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광해군은 선조(宣祖)의 뒤를 이어 15년간 재위하였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실각 축출되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모두 187개월간에 있었던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되어 있다. 각 달마다 한 권씩으로 편철하여 재위 기간 187개월 분이 총 187권(卷)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필사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중초본(中草本): 태백산 사고본)과 정초본(正草本: 정족산•적상산 사고본)이 그것이다. 중초본(中草本)은 초서로 쓰여진 초초본(初草本: 초벌 원고)을 산삭(刪削)•수정(修正)한 미완성의 중간 교정본(校正本)이다. 정초본은 편찬과 교정이 끝난 실록의 최종 원고 즉 완성본을 말하는데, 인쇄의 대본이 되는 것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은 초서로 쓰여진 대본 위에 주묵(朱墨)이나 먹으로 산삭(刪削)•수정(修正)•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많은 부전지(附箋紙)들이 붙어 있다. 특히 초서로 쓰여진 본문 각면의 상하 난외에 보충한 부분이 많다.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楷書體)로 정서되어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정초본과 함께 중초본(中草本)이 남아 있어 내용을 비교•검토할 수 있고 실록 편찬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중초본(中草本)에는 삭제하지 않은 내용들이 많아 모두 187권 64책으로 편철되어 있다. 정초본은 중초본(中草本)의 내용들을 대거 산삭 정리하여 187권 39책이 되었다. 전체의 분량이 중초본(中草本)에 비해 1/3 정도 축소된 것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여러 왕대에 걸쳐 인쇄코자 하였으나, 제7권(즉위년 8월) 일부까지만 이루어지고 그 뒷부분은 끝내 인쇄되지 못하였다. 나머지 180권은 현재까지 정서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10년 11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1624년(인조 2년) 7월부터 1627년(인조 5년) 1월까지의 1단계와 1632년(인조 10년) 1월부터 1633년 12월까지의 2단계에 걸쳐 편찬되었다.

조선왕조의 관례에 의하면 실록은 다음 왕의 즉위 후 곧 편찬하였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즉시 실록 편찬에 착수하지 않고 먼저 광해군대의 시정기(時政記)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이는 실록의 기초가 되는 시정기가 주로 반대 당파인 대북파(大北派) 인물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인조 원년) 8월 경연에서 이수광과 이정귀(李廷龜) 등의 건의로 《선조실록(宣祖實錄)》과 광해군대 시정기(時政記)를 수정하기로 하였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곧바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1624년(인조 2년) 1월에는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춘추관(春秋館)을 비롯한 많은 관청이 불탔으므로 시정기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만 춘추관 서리 홍덕린(洪德麟)이 광해군대 시정기 75권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26권 등을 겨우 건져낼 수 있었다. 1624년 6월 춘추관에서 시정기를 수정하는 것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바로 편찬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전례에 의하여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되었다. 그리하여 일기찬수청을 남별궁(南別宮)에 설치하고 실록청의 예에 준하여 총재관(摠裁官)과 도청(都廳) 및 각방(各房)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임명하고, 그해 7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기초 사료들이 대부분 유실되어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일기(日記), 소장(疏章), 조보(朝報), 야사(野史) 및 문집(文集)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편찬 사업은 빨리 진척되지 못하였다. 1627년(인조 5년) 1월에는 후금의 침입하자 편찬 사업은 중지되고 《일기》의 중초본(中草本)과 중요 문서들을 강화도에 옮겼다. 초고와 잡문서들은 남별궁에 임시로 묻어 두었으나, 후에 대부분 부패•손상되었다. 이 1단계까지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87개월분 가운데 130개월 분이 중초본(中草本)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 분은 초고 상태로 남게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7월부터 1627년(인조 5년) 1월까지 1단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편찬에 참여한 전후 찬수청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摠裁官): 좌의정 윤방(尹昉)

도청 당상(都廳堂上): 이정귀(李廷龜), 김류

도청 낭청(都廳郞廳): 이식(李植), 이명한(李明漢), 이경여(李敬輿), 유백증(兪伯曾), 김시양(金時讓), 정백창(鄭百昌), 정홍명(鄭弘溟), 김세렴(金世濂), 김육(金堉)

일방 당상(一房堂上): 한준겸(韓浚謙), 서성, 홍서봉(洪瑞鳳), 이수광, 권진기(權盡己)

일방 낭청(一房郞廳): 8명(남별궁에 묻었던 문서가 부패된 까닭에 성명 미상)

이방 당상(二房堂上): 정광적(鄭光績), 정엽(鄭曄), 장유(張維), 오백령(吳百齡), 남이공(南以恭)

이방 낭청(二房郞廳): 8명(성명 미상)

삼방 당상(三房堂上): 이시발(李時發), 윤훤(尹暄), 이현영(李顯英), 박동선(朴東善)

삼방 낭청(三房郞廳): 8명(성명 미상)

등록관(謄錄官): 이명운(李溟運), 이제, 이시환(李時煥), 양시정(楊時鼎), 강윤형(姜允亨), 이시직(李時稷), 이성원(李性源), 황상겸(黃尙謙), 박연(朴延), 조업, 김물, 조정(趙靖), 이선행(李善行), 박한, 유질(柳秩), 이유일(李惟一), 김지복(金知復), 최유연(崔有淵), 조경(趙絅), 박안제(朴安悌), 맹세형(孟世衡), 유수증(兪守曾), 원진하(元振河), 임광

1627년 8월에 정묘호란이 수습된 뒤에도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여 편찬 사업을 착수할 수 없었고, 국가 재정의 고갈과 변방의 위태로운 국면 때문에 오래 동안 중지되었다. 1632년(인조 10년) 2월에 가서야 찬수청을 남별궁에 다시 설치하고 편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속행하였다. 그리하여 1633년(인조 11년) 9월까지 133개월분이 중초로 작성되고, 그 해 12월에 187개월분 모두가 중초본(中草本)으로 작성되었다.

편찬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은 다시 정서하고 인쇄해야 하였으나, 재정의 고갈 및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의 편찬 문제 등으로 인쇄하지 못하고, 몇 벌을 정서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34년(인조 12년) 5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87권을 묶어 정서하여 정초본 39책으로 두 벌을 만들어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에 각각 보관하였다. 중초본(中草本)은 64책으로 만들어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속찬과 등사에 관계한 찬수청 전후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摠裁官): 윤방(尹昉)

도청 당상(都廳堂上): 홍서봉(洪瑞鳳), 최명길(崔鳴吉)

도청 낭청(都廳郞廳): 이민구(李敏求), 이명한(李明漢), 이식(李植), 정백창(鄭百昌)

중초 등록관(中草謄錄官: 정원 10명, 전후 교체 관원 병록(幷錄)): 이래(李崍), 정유성(鄭維城), 이규, 안시현(安時賢), 정치화(鄭致和), 조문수(曹文秀), 이시해(李時楷), 최유연(崔有淵), 민광훈(閔光勳), 윤구(尹坵), 신상, 조석윤(趙錫胤), 김경여(金慶餘), 황감, 변시익(卞時益), 정홍임(鄭弘任), 이해창(李海昌), 박선(朴選), 정백형(鄭百亨), 심재, 이기발, 이경(李坰), 홍헌(洪憲)

정서 등록관(正書謄錄官: 정원 50명, 전후 교체 관원 병록)

1방(一房): 홍헌(洪憲), 유덕창(柳德昌), 유석(柳碩), 이조(李, 박일성(朴日省), 박계영(朴啓榮), 엄정구(嚴鼎耈), 최계훈(最繼勳), 이상재(李尙載), 이응시(李應蓍), 이정규(李廷圭), 이시만(李時萬), 이성전(李晟傳), 권령, 안시현(安時賢), 이척연, 김현, 김유 이원진(李元鎭), 임선백(任善伯), 심재, 한흥일(韓興一), 조석윤(趙錫胤), 이수인(李壽仁)

2방(二房): 허계(許啓), 조희진(趙希進), 신상, 정익경(鄭翼卿), 김수익(金壽翼), 이시해(李時楷), 홍주일(洪柱一), 기만헌(奇晩獻), 이지항(李之恒), 허지(許穉), 변시익(卞時益), 권임중(權任中), 여탁, 원해일(元海一), 하진, 김정현(金鼎鉉), 한극술(韓克述), 민광훈(閔光勳), 유영(柳穎), 이중길(李重吉), 오달제(吳達濟), 안헌징(安獻徵), 송희진(宋希進), 김업, 이사상(李士祥), 이영발(李英發), 김광혁(金光爀), 김수남(金秀南), 정지익(鄭之益)

3방(三房): 이지선(李祗先), 정백형(鄭百亨), 원진하(元振河), 정유성(鄭維城), 이상질(李尙質), 황윤휴(黃胤後), 김광혁(金光爀), 신응망(申應望), 이일상(李一相), 이기영(李奇英), 최문식(崔文湜), 송헌길(宋獻吉), 유인량(柳寅亮), 김반(金槃), 신민일(申敏一), 최유연(崔有淵), 최연(崔衍), 최구(崔衢), 강대수(姜大遂), 송두문(宋斗文), 심동귀(沈東龜), 송극현(宋克賢), 김덕승(金德承), 이운재(李雲栽), 이명전(李明傳), 송국준(宋國準), 정도영(鄭道榮), 장희재(張熙載), 조계원(趙啓遠), 윤명은(尹鳴殷)

4방(四房): 박선, 이광춘(李光春), 유영(柳穎), 이해창(李海昌), 조빈(趙贇), 윤구(尹坵), 성이성(成以性), 김경여(金慶餘), 이후석(李後奭), 채성귀(蔡聖龜), 최탁(崔琢), 윤매, 성초객(成楚客), 김효건(金孝建), 임연, 김상적(金尙積), 유심, 김업, 조희인(曺希仁), 정호인(鄭好仁), 변삼근(卞三近), 이래(李崍), 이경(李坰), 송시길(宋時吉), 최시량(崔始量), 심지한(沈之漢), 김중일(金重鎰), 윤양(尹瀁), 목행선(睦行善), 김태기(金泰基)



1-2.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의 체제와 내용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체제와 내용을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광해군일기찬수청의궤》에 소재해 있는 일기 찬수 범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매일(每日)은 갑자(甲子: 干支)만 적는다.

2) 무릇 재이(災異)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초록한 것을 다시 고찰하여 하나하나 갖추어 적는다.

3) 무릇 《상(上)》이라 지칭된 것은 《왕(王)》으로 고친다.

4) 무릇 제배(除拜)는 한직(閑職)•잡직(雜職)•용관(冗官)•산직(散職) 외에는 다시 고찰하여 자세히 기록한다.

5) 대간(臺諫)이 아뢴 것 가운데 초계(初啓)의 경우는 긴요한 말을 모두 적으며, 연계(連啓)의 경우 《連啓》라고만 적되 혹 첨입할 긴요한 말이 있을 경우에는 역시 초록한다.

6) 모든 대간(臺諫)이 아뢴 것은 다만 《憲府》•《諫院》이라고만 적고 와서 아뢴 사람의 성명은 적지 않는다.

7) 각년의 과거 등과인(登科人)은 《취기등기인(取幾等幾人)》이라고 적는다.

8) 명신(名臣)이 죽었을 때는 《졸(卒)》이라고 적는다. 빠진 것이 있는 경우 다시 고찰하여 상세히 보완해 적는다.

9) 무릇 무익하고 번잡한 문자는 다시 참작하여 삭제해서 간결하게 되도록 힘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두 번의 호란(胡亂)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고갈로 인하여 활자로 인쇄되지 못한 채 필사된 정초본 2질과 세초(洗草)되었어야 할 중초본(中草本) 1질이 각 사고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들 사료의 비교를 통하여 실록(일기) 편찬 과정의 구체적인 실상을 살펴볼 수 있다. 중초본(中草本)의 체재와 내용을 정초본과의 비교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중초본(中草本)은 초초본에 직접 주묵(朱墨)이나 흑묵(黑墨)으로 윤문(潤文)•교정(校訂)한 상태의 미완성 원고이다. 따라서 중초본(中草本)에는 정초본에 없는 실록 편찬 과정의 흔적들, 즉 내용의 산삭•보완•수정•편차 이동 등의 작업 과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산삭(刪削)은 내용상 불필요한 기사로 판단된 부분을 삭제하거나 상소문•장계•전교 등의 내용을 요약된 기사체로 정리하기 위하여 번잡한 문장을 부분적으로 삭제한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단일 기사 항목 산삭, 구문 산삭, 단어 산삭의 유형이 보인다. 이외에도 단일 기사 항목 표시(○)에 대한 산삭, 1차 수정 작업시 산삭•보첨•수정된 부분에 대한 재산삭 등의 예가 보이고, 간혹 초초본 작성시 작성자에 의해 잘못 기재된 부분을 즉시 지운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있다.(이 부분은 주로 흑묵(黑墨)으로 처리되었다.) 보완은 초초본 작성시 누락된 사건 기사나 인물에 관련된 기사 및 사론(史論)을 보완한 것으로, 대부분 난외(欄外)에 기록하였다. 수정은 내용이 잘못 기재된 부분이나 불필요한 부분, 또는 축약해도 되는 부분을 삭제한 후 이에 상응하는 구문이나 단어로 수정한 것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난 안에서 처리하였다. 편차 이동은 초초본 작성 당시 기사의 연월일시의 배열이 뒤바뀐 부분을 바르게 재배치한 것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사료의 유실과 인조반정에 의해 집권한 서인들의 편찬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적인 비판이 많이 작용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 정초본의 해제를 참고하기 바란다.



2. 《광해군일기-정족산본》



2-1.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정초본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정초본(正草本)은 수정 보완된 중초본(中草本)을 정서하여 완성한 필사본이다. 따라서 이것이 곧 광해군대의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실록 즉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라고 할 수 있다. 모두 187권 39책이며,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초본은 편찬과 교정이 끝난 실록의 최종 원고 즉 완성본을 말하는데, 인쇄의 대본이 되는 것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楷書體)로 정서되어 있다. 정초본은 중초본(中草本)의 내용들을 대거 산삭 정리하였으므로 전체의 분량이 1/3 정도 축소된 것이다. 중초본(中草本): 태백산본)이 187권 64책인데 비하여, 정초본은 187권 39책으로 편철되어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여러 왕대에 걸쳐 인쇄코자 하였으나, 제7권(즉위년 8월) 일부까지만 이루어지고 그 뒷부분은 끝내 인쇄되지 못하였다. 나머지 180권은 현재까지 정서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10년 11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다. 대체로 1624년(인조 2년) 7월부터 1627년(인조 5년) 1월까지의 1단계와 1632년(인조 10년) 1월부터 1633년 12월까지의 2단계에 걸쳐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24년 6월 일기찬수청을 남별궁(南別宮)에 설치하고 실록청의 예에 준하여 총재관(摠裁官)과 도청(都廳) 및 각방(各房)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임명하고, 그해 7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627년(인조 5년) 1월에는 후금의 침입하자 편찬 사업은 중지되고 《일기》의 중초본(中草本)과 중요 문서들을 강화도에 옮겼다. 이 1단계까지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87개월분 가운데 130개월 분이 중초본(中草本)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 분은 초고 상태로 남게 되었다.

1627년 8월에 정묘호란이 수습된 뒤에도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여 편찬 사업을 착수할 수 없었고, 국가 재정의 고갈과 변방의 위태로운 국면 때문에 오래 동안 중지되었다. 1632년(인조 10년) 2월에 가서야 다시 찬수청을 남별궁에 다시 설치하고 편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속행하였다. 그리하여 1633년(인조 11년) 9월까지 133개월분이 중초로 작성되고, 그 해 12월에 187개월분 모두가 중초본(中草本)으로 작성되었다.

편찬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은 다시 정서하고 인쇄해야 하였으나, 재정의 고갈 및 《선조실록수정(宣祖修正實錄)》의 편찬 문제 등으로 인쇄하지 못하고, 몇 벌을 정서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34년(인조 12년) 5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87권을 묶어 정서하여 정초본 39책으로 두 벌을 만들어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에 각각 보관하였다. 중초본(中草本)은 64책으로 만들어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선조 41년 2월 1일 선조가 사망하였다. 이에 부득이 한 경우에는 실록을 상고할 것을 와뢰였고 세자는 이를 윤허하면서 한 건을 써서 들여보내는데 만약 바쁘면 들어와서 아뢸 것을 명하였다. 이 기사는 잠시도 국사를 폐할 수 없으므로 '계(啓)'자와 옥새를 동궁에 전하고 염습도 하고 수릉관을 정한 후의 기록인 것으로 보아 국장과 즉위에 관한 중대사를 실록에서 상고할 것을 청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즉위한 4월 비망기로 산림에서 학문을 닦은 선비를 쓸 때 과목(科目)에 구애받지 않고 경연관(經筵官)이나 세자빈객(世子賓客) 등의 직임을 제수한 전례와 선왕이 왕위를 계승한 후 궁관(宮官)들에게 상 준 예를 실록에서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5월에는 예조에서 선조의 상에 발인할 때 주상이 고별하는 자리를 설치하는 것에 관해 실록을 상고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인종실록(仁宗實錄)〉을 상고하여 장례를 치르는데 참고하였다.

8월에는 춘추관에서 대비 즉 인목왕후(人穆王后)의 존호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위해 실록을 상고하였다. 그러나 시대마다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즉 예종년간 대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경우는 세조가 승하한 6개월 후 차길(借吉)하여 상존호의 예식을 거행하고 진하(陳賀)와 반교(頒敎)를 하였다. 성종년간 대왕대비 즉 정희왕후(貞熹王后)와 대비 소혜왕후(昭惠王后)에게 존호를 올린 때는 세조를 태묘에 부묘한 후 진전(進箋)과 진하를 하고 이튿날 수하(受賀)와 반교를 하였다. 명종년간에는 대왕대비 즉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왕대비 즉 인성왕후(仁聖王后)에게 존호를 올렸으나 진하와 반교는 하지 않았었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하여 광해군 2년 4월에 대비에게 정의(貞懿)란 존호를 추가로 올렸다.

9월에는 죄인 유영경(柳永慶)과 이홍로(李弘老)의 일에 대해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청하자 왕은 이에 대해 실록을 참고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소북(小北) 유영경(柳永慶)은 선조 말년 선조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선조가 사망 직전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 그러나 교서를 감춘 것이 탄로나 이이담(李爾膽)과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때 왕은 유영경(柳永慶)이 부왕의 대신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전(師傳)이었기 때문에 대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홍으로 유배를 보냈으나 대신들의 끈질긴 요구에 응해 결국 자진하라 명한 뒤였다.

11월에 망궐례(望闕禮)는 사대와 관계되는 일이므로 폐지할 수 없는데 삼년상을 당했을 때에도 그대로 거행하는 가의 여부를 고증하였으나 다른 자료가 없었다. 이에 실록을 상고하게 한 바 태종년간과 문종년간의 기록에는 국상 3년간 기간 안에도 그대로 망궐례를 거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진한 점이 있어서 중종 이후의 실록을 자세히 고출하도록 명하였다. 다음날 대신들이 의견을 모아 크고 작은 예절을 직접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유독 망궐의 큰 예만 폐하고 직접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의심나지 않는 일은 전례를 고증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고 아뢰어 실록고출을 중지하게 하였다.

이어 12월 비망기로 탄일과 동지에 옷감 한 벌을 대비전에 올리는 절차에 대해 재가를 청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살펴 의논해 정하라고 예관에게 명하였다. 이는 실록등본을 통해 삼년상 안에 열성들이 대비전에 옷감 한 벌을 올리는 전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동월 광해군의 책봉을 인준하는 명의 조칙사신이 곧 당도할 것이므로 사은의 예를 거행할 것을 논의하던 중 실록을 고출하기로 하였다. 결국 성종년간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란종(鄭蘭宗)을 명나라에 보내 제사를 지낸 것과 왕위계승(王位繼承)을 인정(認定)한 것에 대해 사은한 바 있고, 인종년간 우의정(右議政) 성세창(성(成世昌)과 공조판서(工曹判書) 강현(姜顯)을 보내 사은만 하고 따로 두 차례 사신을 보낸 예가 없다는 것을 고출하였다. 이에 대신을 보내 겸하여 사은할 것을 논의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한 직후인 2월에 이호민(李好閔)을 선조(宣祖)의 고부청시습사(告訃請諡襲使)로 삼고, 오억령(吳億齡)을 부사로 삼아 명에 보내었다. 이들이 12월에 돌아오자 상을 내리기 위해 실록을 고출하게 한 바, 고부사(告訃使), 청시사(請諡使), 승습사(承襲使)의 사신들에게 상을 내린 것은 중종조의 사례가 참고될 수 있었다. 당시 노공필(盧公弼)이 인준을 받지 못하였고 그 뒤에 성희안(成希顏)이 인준을 받아왔는데 모두 노력한 것으로 채택되어 상을 준 바 있었다. 이때는 이호민(李好閔)은 주청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나 뒤따라간 이덕형(李德馨)이 광해군의 책봉인준을 받아왔던 것이다.

광해군 1년 1월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의 수릉관(守陵官)인 박동량(朴東亮)이 모친상을 당하였다. 수릉관은 임금의 상복을 입고 있으므로 사친(私親)의 복을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동량(朴東亮)의 심사가 지극히 참담하여 직무를 순조롭게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아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결국 예전 규례의 유무에 너무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대신의 건의에 따라 수릉관(守陵官)을 개차하라고 명하게 된다.

3월에는 명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한 후 지낼 제사절차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에 명조(明朝)가 사제(賜祭)할 때 가주(假主)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지의 여부에 대해 실록을 상고할 것을 예조에 아뢰었다. 춘추관에 명해 상고하게 한 바 다른 실록에는 상고할 것이 없었고 인종조에만 가주(假主)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실록에서 자세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논란이 많았으나 결국 가주(假主)를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5월에는 세자를 책봉한 후 진하하고 반사(頒赦)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절목인데도 전일 실록을 고출한 내용에 상세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즉 태종조에는 진하만 있고 사면은 없었으며, 세종조에는 진하와 사면 모두 없었으며, 심지어 단순히 진하니 반사라고만 적혀있고 적용한 예와 사면한 죄목은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에 다시 상세하게 고출해서 보고하라고 비망기로 명하였다.

7월에는 이조에서 진휼사(賑恤使)는 막중한 직임과 관계되고 그 사람이 직분을 다하는가에 달렸지 관직의 고하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하는 대신들의 논의를 보고했다. 진휼사 최관(崔瓘)의 계사 때문에 좌의정이 실록을 상고하였던 바, 진휼사는 통정관에게 맡긴 적도 있었고 중신에게 맡긴 적도 있었다. 최관(崔瓘)의 계사는 기록된 바 없지만 5일전에 진휼사에 임명된 최관이 사양을 하면서 대신을 보낼 것을 건의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로 왕은 최관(崔瓘)을 그대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10월 강상(綱常)의 죄인 논남(論男)의 옥사로 판의금부사 이호민(李好閔)이 삼성추국(三省推鞫)할 일이 있었다. 이때 이호민(李好閔)은 전례에 따라 자신을 체면(遞免)시켜줄 것을 청하자 좌차(座次)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이호민(李好閔)을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서 보국(輔國)에 올랐었는데 당시 전례에 의해 본직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자 왕은 춘추관에 명해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으며 춘추관은 보국(輔國)과 찬성(贊成)은 의정(議政)을 대할 때 체면(遞免)하여 절하고 동벽(東壁)에 앉는다는 전례를 찾아내어 보고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10월 선조의 대상(大祥), 담제(禫祭), 부묘(祔廟) 등의 제사에 시행해야 할 절목과 여러 집사(執事)의 상격(賞格)을 조사하고 세자책봉(世子冊封)에 온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규례를 태종 이후의 실록에서 상고할 것을 명하였다.

같은 달 책례도람(冊禮都監)에서 자전, 중전과 왕세자에게 존호를 올리는 책례에서 중전(中殿)의 교명(敎命)과 옥새(玉璽)는 선조 36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人穆王后)의 가례 때의 교명과 옥새를 견본으로 할 수 있었으나, 왕세자의 교명과 옥새는 고증할 만한 전례가 없었다. 이에 왕세자 교명의 무늬와 색깔을 고증할 것과, 왕세자의 옥새는 금상이 동궁에 있을 대의 옥새와 종묘에 보관되어 있는 선대의 왕세자 옥새를 봉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실록을 고증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열성조의 내전(內殿)에 존호를 올린 것과 왕세자 책봉의 전례도 아울러 고증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예조의 건의에 따라 선조의 대상 후 혼전에 제사지내는 여부를 〈오례의(五禮儀)〉와 실록을 상고하게 한 바 있었다. 이에 대상제(大祥祭) 두에 담복(淡服)을 입는다는 내용에 의거하여 삭망제(朔望祭)는 그대로 행하고 상식(上食)을 정지하게 되어 입번하는 종실을 파출할 것을 정하였다.

광해군 2년 1월 선조의 대상 때에 복색을 상고하여 결정하는 일로 이미 실록을 상고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실록을 상고할 때 성종년간 덕종(德宗) 내외를 추숭한 연월과 그에 따른 전례(典禮)의 절목(節目), 당시 전교(傳敎)와 복계(覆啓)한 일을 아울러 상고하게 하였다. 또한 세자(世子) 태실(胎室)을 고쳐 다시 봉하는 규례가 있는지도 상고하게 하였다. 곧 이어 대상 후의 복색을 상고한바 참포(黲布)의 색을 실록에서 상고하였으나 참(黲)이 무슨 색깔인지 특별히 나타난 곳이 없었다. 다만 명종년간 예조의 계사에 참은 청흑색인데 지금은 옥색을 사용하고 있다란 기록만 있었다. 이에 전일의 규정에 의거하여 옥색을 사용할 것을 전교하였다. 이때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정구(李廷龜)가 고출하였다.

1월에 또 예조에 전교하기를 대상 하루 전날 친히 혼전(魂殿)에 고하는 제를 행할 것이라고 전교하였다. 이때 예조에서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전교와 같이 행했으나 그때는 〈오례의(五禮儀)〉가 편찬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가례(家禮)〉에 의거하였는데 이는 〈오례의(五禮儀)〉의 절목과는 크게 다르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실록을 고출한바 내상(內喪)이 앞에 있고 대왕의 상이 뒤에 있으면 사왕(嗣王)이 대왕을 부묘할 때 모후의 존호를 추상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원경왕후(元敬王后), 소혜왕후(昭惠王后), 장순왕후(章順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의 경우가 명백한 고례이므로 춘추관에서 별단에 써서 보고하자 모후(母后)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을 속히 마련해서 거행하라고 전교하였다.

같은 달에 예조에서 반드시 고사에 의거해야만 후회가 없을 것인데 국조 수백년의 문적은 병란을 통해 잃어 매번 실록을 상고하자고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온당하지 못하며, 또 실록의 권수가 많아 급하게 하루 사이에 상고하려면 제대로 찾아낼 수 없는 실정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실록 중에서 길흉군빈가(吉凶軍貧嘉)로 분류하여 모든 의주(儀註)와 절목에 관계되는 근거사례를 초출하여 중국의 〈소대전칙(昭代典則)〉이나 〈전고기문(典故記聞)〉처럼 만들어 예조에 비치해두고 영구히 전거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이에 왕은 자세히 고찰하여 두 건을 등서하여 한 건은 예조에 비치하고 한 건은 궐내로 들이라고 전교하였다.

2월에 다시 전교하여 실록을 상고해낼 때 조종조의 담제(禫祭), 부묘(祔廟)를 한 뒤에 사직(社稷)과 영녕전(永寧殿)에 대한 친제(親祭), 배릉(拜陵), 알성(謁聖), 친경(親耕)과 왕비친잠(王妃親蠶) 등의 전례를 자세히 써서 아뢰도록 하였다. 또한 의인왕후(懿仁王后)의 휘호(徽號)를 정하는 일은 하루가 급하므로 실록을 상고하되 3일 내로 속히 상고해 들이라고 비망기를 보냈다. 이어 실록을 상고해낼 때의 자전(慈殿)에게 휘호를 올린 뒤에 진풍정(進豊呈)한 일에 대해서도 전례를 상고하라고 비망기로 일렀다.

같은 달에 창덕궁의 중건이 완성되었다. 왕은 새 궁궐에 들어갈 때에는 도액(度厄)한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실록을 상고할 때 찾아서 보고하라고 전교하였다. 또 유생으로 전강(殿講)에 입직한 사람에게 줄 상격에 대하여도 조종조의 실록에 반드시 그 전례가 있을 것이므로 아울러 상고하여 써들이라고 전교하였다.

3월에는 예조에서 세자의 관복착용에 대하여 건의하였다. 이때 세자는 관례를 치르기 전이었다. 세자의 관례는 대부분 책봉한 뒤에 거행하였으므로 관례 전에도 신료들을 접견할 때 착용하는 관복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여 실록을 상고하게 한 것이다. 명종년간의 기록에 대신의 의논에 세자가 어려 예관(禮冠)을 쓸 수 없는 형편인데 중종조에 이미 충정관(忠靜冠)을 쓰게 하였으니 관례에 따르는 것이 합당하는 기록이 있었으므로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

7월에는 중국에 갈 사은사가 떠날 날자가 임박하였는데 주청(奏請)에 대한 논의와 문서 마련에 대해 언급이 없으므로 체근하면서 고명(誥命)에 관한 일은 실록을 상고하라고 예조에 전교하였다. 춘추관에서 실록을 상고할 일이 없다고 아뢰었다. 이에 왕은 다시 전교하여 태조조 이후 전례를 속히 다시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춘추관에서 조종의 실록을 다시 상고한바 제각기 상략이 같지 않았으나 칙서를 싣지 않은 경우에는 당시의 하사물을 상고할 수 없었고 칙서를 실은 경우에는 하사물을 실었으나 면복을 하사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성종년간 사신 정동(鄭同)이 왔을 때의 기록에는 관복을 하사하지 않고 옷감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왕은 전교하여 〈오례의(五禮儀)〉에는 경태(景泰) 원년에 하사한 세자의 면복도식(冕服圖式)이 분명히 실려있고 자세한 주석가지 있는데 실록에만 빠져있는 이유를이해할 수 없다며 대신에게 물어 아뢰라고 하였다. 8월 대신들이 의논한 바를 보고하기를 이언적(李彦迪)과 신광한(申光漢)의 기록은 사신(詞臣)이 찬양하기 위해 수식한 듯싶으니 이를 인용하여 전례로 삼기는 어려우므로 중국에 세자의 면복을 경솔하게 주청한다면 물리침을 당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8월에는 선대에 자전(慈殿)에게 진향(進香)할 때 마련했던 의절(儀節)을 실록에서 자세히 조사하라고 춘추관에 전교하였다. 또 예조에서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때 양무(兩廡)의 각 신위에 아울러 고유(告由)하는 일과 관련하여 춘추관에서 실록을 조사해 보았는데 근거할 만한 고례를 찾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전에 의논한 바와 같이 전상(殿上)과 동서무(東西廡)에 아울러 고하고 처음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들어가는 신위는 봉안제(奉安祭)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궁궐을 새로 지어 이어(移御)할 때 고묘(告廟)하는 일과 행해야 할 전례를 예조에서 주관하기 위해 아뢰었다. 그러나 난리로 각종 의범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의거할만한 예를 널리 상고하도록 하였다. 조종조에서 궁궐을 영선한 뒤 임어했을 반드시 행했을 것으로 실록에서 상고해내게 하였다. 4일 후 새 궁궐로 옮길 때의 고묘에 대한 전례가 명종년간에도 있고, 선조년간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한 뒤 11월에 고묘하고 12월에 옮겼던 전례가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왕은 윤허하면서 실록을 상고할 때 행해야 할 의례 일체를 다시 세밀하게 고찰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능을 참배하게 되는데 당시 제관에게 상격을 가한 일이 있는지의 여부와 궁을 새로 지어 완공한 다음 도제조에게 논상한 전례도 실록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11월 세자가 조강에 들어와 참여하는 것이 온당한 지의 여부를 해당관청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되 실록에서도 아울러 상고하게 하였다. 실록과 관련자료를 조사한 후 세자가 조강에 참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예조가 아뢰었다. 이에 왕은 세자도 서연에서 강하는 일이 있으니 특명이 있는 날은 입시하게 하였다.

광해군 3년 초에 왕세자와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박자흥(朴自興)의 딸과의 가례가 있었다. 1월 가례의 준비를 위해 가례도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가례 때 찬영하는 예는 마땅히 세자빈의 본가에서 행해야 하지만 조종조의 구례는 태평관(太平館)에서 거행했다고 하는데 실록을 조사해서 전거가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왕은 윤허하면서 응당 행해야 할 절목도 상세히 베껴 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때 세자가 가례를 올린 장소에 대해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태평관에서 거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세계(璿源世系)〉에 의하면 가례를 태평관에서 올린 경우는 중종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선조 계비인 인목왕후(人穆王后) 김씨(金氏)가 있었다. 인조 계비 이후는 대개 어의동본궁(於義洞本宮)에서 행해졌다. 이 기록에는 광해군과 그 세자의 일은 수록되지 않았다.

이어 세자의 친영가례가 있었는데 이때 승지가 잘못 알려주어 승지와 예조의 관원이 추고되었다. 즉 세자가 찬영하는 날 난간에 나가 초계(醮戒)하는 말은 임금이 친교(親敎)하는 것이 아니고 전교관을 시켜 전고(傳告)하는 것이 실록등본에 실려 있는데 행례시 승지가 친교한다고 계청해서 세자가 오랫동안 꿇어있게 했다고 비망기로 일렀다. 이어 사간원에서 친영가레 의식을 잘못 아뢴 승지와 예조의 관원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당해낭청을 파직하고 색승지와 예조낭청을 추고하였다.

7월에는 자전이 창덕궁으로 이어할 대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거행해야 할 예를 모두 상세히 살펴 전례에 따라 거행할 수 있도록 해당관청에 명하였다.

8월 실록을 상고하여 세자빈의 아비에게 관직을 제수하라고 전교하였다. 이리하여 세자빈의 아비인 박자흥(朴自興)에게 6품을 승진시켜 전적(典籍)을 제수하게 된다.

9월말에는 왕비의 향관(鄕貫)에 승호(陞號)한 전례를 조종조의 실록에서 살펴 아뢰라고 전교하였으나 결과에 대해서는 실록에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1월 왕은 세자의 출합례(出閤禮)에 대한 전례를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오례의(五禮儀)〉에는 왕자군(王子君)과 옹주(翁主)의 혼례에만 출합례가 있고 택일만 하여 아뢴다고 보고하였다. 이번 왕세자의 가례는 경우가 다르므로 역대의 실록등본에 기록이 없다고 아뢰었다. 이에 왕은 세자의 출합례가 옛 부터 있었으니 실록을 다시 자세히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4년 2월 왕은 선조 28년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의 서거시 동궁 거애례를 고찰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세자의 외조부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이에 기사관 홍경찬이 일기와 실록을 상고한바 실록에는 당시 4월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의 부인 즉 완산부부인이 서거하였는데 거애의 예는 예문과 법전에는 있으나 근래에는 시행한 때가 없었기 때문에 거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결과로 별도의 거애는 하지 않았다.

9월 우상(右相)의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 겸대에 대해 대신들이 의논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즉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된 이후 상직(上職)에 있었던 자가 모두 문관이었으므로 문직(文職)이 아니면서 춘추관과 승문원을 겸대한 일은 조종조의 규례를 상고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은 모두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을 겸하고 있으므로 별도로 보양관의 명칭을 만들 것 없이 우의정으로 하여금 사전(師傳)의 직임을 겸하게 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실록을 자세히 상고하여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9월초에 우상의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 겸대에 대해 실록을 상고하란 명을 받들어 춘추관에서 우선 의정부삼공안(議政府三公案)에서 문관이 아니면서 재상이 되었던 자를 조사해보았다. 결과로 문관이 아닌 재상은 태조년간 2명, 태종년간 2명, 세종년간 4명, 단종년간 1명, 세조년간 4명, 예종년간 1명, 성종년간 3명, 연산군년간 2명, 중종년간 1명 이었다. 이들은 모두 음관(蔭官)이거나 무관(武官)이었다. 실록에서 업무와 관련된 관직만 기록되어 있고 겸직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상고할 수 없었다. 문집에는 비명(碑銘)과 행장(行狀)을 수록한 경우가 많으므로 홍문관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9월에는 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모역(謀逆)한 자에 대한 율을 적용함에 일정한 규례가 없는 것 같으니 실록을 상고할 때 태조 이후부터 상세히 상고하라 전교하였다.

광해군 5년 5월말 방석(芳碩)의 변란 때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처치했던 절목을 태조부터 태종가지의 실록을 자세히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이 일이 조속히 진행되지 않자 6월에 거듭 실록을 고출하라고 재촉한 기사가 있다. 왕이 누차 춘추관을 독촉하여 실록을 상고하라고 한 것은 조정이 폐모의 논의 즉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人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논의를 제기하라고 유도한 것이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춘추관에서는 영의정(領議政) 이덕형(李德馨)은 병이라 칭하였고, 지사(知事) 이정구(李廷龜)는 사직차자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고, 동지사(同知事) 오백령(吳百齡)은 고신을 빼앗자는 추고가 입계되어 실록을 상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록을 고출할 수 있는 원인은 지사(知事) 이이담(李爾膽)과 동지사(同知事) 최유원(崔有源) 밖에 없어서 3월이 합석하지 않아서 실록을 상고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이정구(李廷龜)와 오백령(吳百齡)을 모두 일찍 출사하게 하여 3명을 갖추어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로 보아 춘추관의 실록각을 열기 위해서는 3명의 사관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6월에 왕명에 따라 감사(監事) 이항복(李恒福), 지사(知事) 이이담(李爾膽), 기사관(記事官) 정백창(鄭百昌) 3인이 모일 수 있어 실록을 고출하였다. 이때 이이담(李爾膽)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초상화를 정릉으로 옮기었다란 기사를 찾아 정백창(鄭百昌)에게 기록하게 하자 정백창(鄭百昌)은 이방석(李芳碩)을 토벌한 기사를 뽑으라고 명했으므로 이 기사는 상고해서는 안된다고 했고 이이담(李爾膽)은 이 일은 그 본말이니 뽑아야 한다고 했다. 정백창(鄭百昌)이 불가하다고 버티고 있는데 이항복(李恒福)이 탄핵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와 실록고출을 파하였다. 그 뒤 대신들이 사직하였고 정백창(鄭百昌)도 사직했으므로, 6월 6일 다른 사관을 갖추어 신덕왕후(神德王后), 이방석(李芳碩)과 이방번(李芳蕃)의 일을 아울러 상고하여 아뢰었다. 결국 영창대군은 광해군 6년 2월 강화부사에게 살해당하였고, 인목대비(人穆大妃)는 광해군 10년 1월 서궁에 유폐된다.

6월 조정이 집안변고를 만난 후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하례를 드린 적이 많았으므로, 태조로부터 명종까지 실록에서 변에 대처한 일을 상고해 아뢰게 하고 친국에는 겸춘추 1명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의 집안변고란 영창대군의 살해와 김제남(金悌男)의 사사(賜死)와 관계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광해군 6년 4월 조종조에 친히 기우제를 지낸 고사를 상고해내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에 태조, 태종, 세종, 인종, 명종의 실록을 상고하였었다. 기우제에 관계되는 절목은 사책에 끊임없이 나왔으나 친제는 명종조에만 있었으므로 명종조의 전례만을 기록하여 올렸다. 그러나 상고한 것이 자세하지 않으므로 내일 다시 조종조의 친제와 절을 올리고 향축을 전하는 절목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같은 달 예조에서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에 친제하는 의주를 마련하기 위해 〈오례의(五禮儀)〉와 실록을 찾았으나 친제하는 의주를 찾아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선농제(先農祭)에 친제한 의식에 의거하고 학덕 높은 노인들을 방문한 후 수습해 마련했다. 따라서 친제에 몸소 헌작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을 것 같아 대신에게 의논하게 했다.

6월에는 왕자의 재취에 대해 실록을 상고한 바 이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다. 또한 〈명종실록(明宗實錄)〉에서 친히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전례를 8년 4얼 기록에서 찾아내었는데 기우제 지낸 후 일주일만에 비가 내렸다고 쓰였고 상격에 대한 내용은 찾지 못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9월에도 실록을 고출할 일이 있었다. 이때는 중종년간 책비천사(冊妃天使)가 나왔을 때의 일과 조종조의 기우제를 친히 지내고 나서 내리는 상격이 있는 지의 여부를 상세히 고찰하게 하였다. 이때 상세하게 고출하기 위해 겸춘추를 많이 모아서 고출하였다. 다음날 책비천사의 접대에 관한 일 뿐만 아니라 천사와 관계된 전교, 계사 등 크고 작은 일을 낱낱이 고출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7년 1월에도 동지춘추(同知春秋) 남이공(南以恭)과 우참찬(右參贊) 박건(朴楗)이 실록을 고출하였는데 고출한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5월에도 가뭄은 극심하였다. 이에 이틀 후부터 3일 동안 사직(社稷), 종묘(宗廟), 북교(北郊), 저자도(楮子島), 덕진(德津), 송악(松嶽), 감악(紺嶽), 오관산(五冠山)에는 중신을 보내고, 용산강(龍産江)에는 근신(勤愼)을 보내어 비를 빌고, 박연(朴淵), 양진(楊津), 심호두(沈虎頭), 진암(辰岩)에는 분시(焚柴)하여 비를 빌게 하였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고 풍악을 거두는 일은 왕의 재량이라고 예조에서 아뢰자 이에 대한 것을 실록에서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춘추관에서는 실록은 양이 많기 때문에 이정형(李廷馨)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일기를 상고해서 보고하였다. 이때 왕은 임진왜란 후에 정전을 피한 일도 자세히 상고하라고 지시하였다.

6월 왕후추숭도감(王后追崇都監)의 칭호를 왕후부묘도감(王后祔廟都監)으로 고치고 부묘청의 명호를 실록에서 고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즉위 2년 3월에 사친인 공빈(恭嬪) 김씨(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는데, 이 해 8월말에 공빈(恭嬪)에게 명순(明順)을 추숭하고 신주를 고쳐 썼다.

8월 창경궁(昌慶宮)을 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풍수에 대해서 선수도감(繕修都監)에 명해 상세히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의논한바 많은 술관(術官)들은 모두 옛터의 동향이 좋다고 하였으나 이의신(李懿信)과 허신직(許身稷)만 새터의 남향이 좋다고 하였기 때문에 도감에서는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술관들이 열무정(閱武亭) 등에서 범철(泛鐵)한 내용을 별단으로 보고하자 왕은 창경궁을 처음 세울 대의 전교, 계사와 술관들의 논의를 〈태조실록(太祖實錄)〉에서 상세히 고찰하라고 명하였다.

광해군 8년 8월 왕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조가 정난(靖難)한 일로 몸소 남교(南郊)에 제사를 올린 뒤 존호를 받은 고사를 전례로 삼을 수 있어서 실록을 상고해서 고사대로 거행하라고 전교하였다. 또 세조년간에 존호를 올린 계사와 비답, 존호를 올리고 잔치를 연 날짜와 의식 절차 및 정희왕후(貞熹王后)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잔치를 열고 하례를 행한 처소를 실록에서 자세히 상고할 것을 재차 명하였다. 실록을 상고하기 위해 길일을 따져보니 가까이는 길일이 없고, 8일과 12일이 평일이기 때문에 두 날짜 가운데 중대사가 없는 날에 사고문을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권질이 많고, 의주(儀註)가 많아 하루 만에 베낄 수 없어서 겸춘추들을 모아 서둘러 남교의 교제절목(郊祭節目)부터 상고하고 존호 올리는 일도 연일 상고하여 빠짐없이 서서 보고하게 하였다. 절목의 양이 많아 사관과 겸춘추가 연일 상고하여 난초(亂草)로 베꼈으나 정서(正書)에도 시간이 걸리므로 대강만 적어 보고하였다. 나머지 의절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예조에 보내 의주를 마련하게 하였다. 이어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진하를 받은 처소는 근정전(勤政殿)이었고 존호 올린 데에 대한 계사와 비답은 없었음과 존호를 올리고 수연(壽宴)을 연 날짜를 보고하자, 왕은 베낀 초본을 먼저 봉입하고 왕이 본 후에 다시 정서하여 들이도록 하라고 명했다. 왕이 실록등본을 보니 교제절목(郊祭節目)이 너무 많아 정해진 날까지 대지 못할 것 같아 예관에게 속히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명했다. 결국 10월에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김제남(金悌男)을 추형한 일 즉 계축(癸丑)의 존호(尊號)는 이듬해 광해군 9년 10월말에 받았다.

10월 윤횡(尹宖)이 선대에 진소하여 변무(辨誣)한 일이 있는지의 여부를 실록에서 상고하라 전교하였다. 또 내년 봄의 친경일(親耕日)을 의논하였다. 이때 친경(親耕)을 3월에 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자 친경(親耕)은 임금이 먼저 중춘에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보여 근본에 힘쓰게 하는 의미가 있고 3얼은 이미 봄보리를 파종한 뒤라서 호위 인마가 백성들의 밭을 짓밟는 폐단이 있으므로 3월로 앞당길 것을 승정원에 아뢰었다. 이에 왕은 실록을 상세하게 고출하라고 전교하였다. 그러나 친경일은 몇 차례 연기되었고 드디어 광해군 12년 3월에 친경을 행하게 된다.

12월에는 곤수(閫帥)가 근친(覲親)을 위해 상소한 전례가 있는가를 실록에서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변장(邊將)이나 변수(邊帥)는 비록 늙고 병든 어버이가 있더라도 마음대로 정소(呈疏)하고 출입하지 못하는 것은 관방(關防)의 중지(重地)를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법금(法禁)이 매우 엄한데 더없이 중대한 실록을 이 하찮은 일 때문에 경솔하게 상고할 수 없음을 아뢰었다. 왕은 다른 일을 상고할 때 아울러 상고하라고 명했는데, 며칠 후 춘추관에서 선조 18년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변방의 일을 진주(進奏)하고 모친을 찾아뵙기 위해 한양에 온 일이 있다고 아뢴 것으로 보아 이때 실록을 상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공홍수사(公洪水使) 신경징(申景澄)과 남도병사(南道兵使) 현집(玄䁒)에게 죄줄 일이 특별히 없다고 속히 부임하라 명을 내렸다.

광해군 9년 12월 왜에 갔던 사신이 돌아왔다. 이로서 회답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梓)는 가자하고 종사관 이경직(李景稷) 이하의 관원에게는 선대에 상을 주었던 관례에 의해 시상하고자 실록을 상고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10년 3어 친경에 따른 별시를 윤4월 24일 후원에서 행하기를 정하였다. 이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살펴본바 당시 8년 3월 11일 친경하고 12일 인정전에서 위로의 주연을 베풀고 문과를 출제한 후,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에 친림하여 각 41명을 뽑았었다. 이를 보고하자 왕은 전례에 따라 시행하라고 전교하였다.

4월 왕의 눈병이 심하여 중국에서 오는 칙서를 맞이하는 행사를 몇 차례 연기하였는데 날짜를 더 이상 물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로서 춘추관 당상 3인에게 선조의 실록을 상고해서 백관으로 하여금 칙서를 맞이했던 절목을 아뢰라고 하였다. 실록을 상고한바 백관들에게만 칙서를 영접하게 한 예가 없었으므로 병세에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바로 칙서를 영접하는 대례를 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의 병은 차도가 없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연기하다가 윤4월말에야 모화관(慕華館)에서 조칙을 맞이하였다.

광해군 11년 3월 왕은 임진왜란 초기에 이양원(李陽元)이 검찰사(檢察使)로 있었는지의 여부를 선대의 실록에서 상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명을 돕기 위해 출병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은 이듬해도 후금의 적중에 붙잡혀 있었다. 4월에 이르러 필시 강홍립(姜弘立)이 적의 정세를 자세히 알 것으로 생각하여 왕이 하유하고자 하였으니 비변사(備邊司)에서는 하유하게 될 경우 일의 체모가 미안하고 혹은 노적(奴賊)에게 잡힐 염려도 있으므로 하서국(下瑞國)이 강홍립(姜弘立)에게 전하여 그들의 사정을 기록하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을 때 하유하지 않았는지 선대의 실록을 상고하고 하서국(下瑞國)의 말로 전할 수 없으니 비변사에서 물어볼 말을 상세히 기록해서 줄 것을 명했다.

광해군 12년 4월 친경(親耕) 후 상격하는 전례를 성종 이후의 실록에서 고찰하도록 명하였다. 광해군 8년부터 친경하려고 하였으나 겨우 이때 친경을 하였고 그 포상을 하고자 한 것이나 실록에는 실제 포상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4월에 명의 만력황후(萬曆皇后)가 돌아갔다는 부고를 받았다. 예조에서 5일간 정조시(停朝市)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오례의(五禮儀)〉에는 황제를 위해 거애(擧哀)하는 의식은 있으나 황후에 대한 절차는 없었다. 이디에 근거할 바를 몰라 왕에게 아뢰니 선대 조정에서 진태후(陳太后)의 상에도 거애하는 일이 없었던 듯하지만 선대 실록을 급히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진태후(陳太后)의 상을 당했을 때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태종과 세종의 실록을 상고해본 바 갑인년 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의 상을 당하여 부고를 들은 다음날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한 예가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5일 동안 정조시(停朝市)하였다.

5월에 조종조의 실록과 승문원(承文院)의 등록(謄錄)에 모두 '배표(拜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것이 동지에 가는 사행인 것을 예조에서 모르고 있었다. 이때 하교를 받아 승문원의 〈부경록(赴京錄)〉을 상고해서 8월 중순에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왔음을 보고하고 아울러 이때 음악의 사용여부는 왕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아뢰었다. 왕은 황태후의 상기에 5일 동안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전례가 있으니 이를 따를 것이며 과거실시를 오래 폐지할 수 없으니 정시를 속히 시행하라고 명했다.

광해군 13년 1월 춘추관에서 선대의 실록을 보니 임진년 이전은 물론 임진년 이후도 소략하고 빠진 부분이 많아 상고해낼 가능성이 없다고 아뢰었다. 아울러 선조 36년에 중국사신이 왔을 때 이호민(李好閔)에게 임시로 예조판서(禮曹判書) 직함을 주어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는 기억이 있다고 아뢰니 속히 실록을 상고하라 명하였다. 이로서 중국사신을 맞을 원접사의 임명에 관한 기사를 고출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14년 7월 왕은 인종년간 경회루(慶會樓)가 벼락 맞은 변고와 명종년간 독간(纛竿)이 벼락 맞은 변고에 대하여 당시의 하교와 계사, 다시 만든 날짜와 절목들을 실록에서 자세히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춘추관에서는 경회루의 개축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으나, 인종 1년 6월에 벼락 맞았고 다음 해인 명종 1년 정월에 경회루(慶會樓)에서 중국사신을 접대했다고 하니 개축하지 않고 큰 손님을 접대했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어 다시 상고한바 궁궐이 벼락 맞은 변고가 실록에 실려 있는 곳이 세 군데였는데 당시 정전(正殿)을 피한 일,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 일, 개축에 관한 절목은 없었고, 대신들의 보고만 실려 있어 신하와의 문답을 베껴 보고하였다. 이는 7월초에 인경궁(仁經宮) 가운데 정문 기둥과 협문에 벼락이 쳐서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3. 조선실록(朝鮮實錄)의 보존(保存)



3-1. 실록(實錄)의 봉안(奉安)



문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완성된 서적을 서고에 납입시켜야 한다. 실록은 국가의 매우 중요한 사적이었으므로 서고에 납입시키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실록을 사고에 납입시키는 것을 봉안이라고 하였는데, 장엄한 의식에 따라 봉안되었다. 사고에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정만 알 수 있다. 봉안에 앞서 반드시 사고를 개고할 일시를 추택하였다. 실록을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봉리식(封裏式)을 한 후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실록을 봉안하기 전에 실록을 비단 보자기에 싸서 실록궤에 넣는 의식이 봉리식(封裏式)이다. 봉과하기 위해 총재관(總裁官) 이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들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나와 먼저 실록의 권질과 장황을 봉심한 후에 궤를 받들어 地衣(지의) 위에 놓는다. 이때 개권(開卷)할 수는 없었다. 이어 궤를 열고 천궁(川芎)과 창포(菖蒲) 가루 부대 하나를 궤의 바닥에 넣고 저주지(楮注紙) 반장을 부대 위에 덮은 다음 홍정주사폭보(紅鼎紬四幅袱)를 저주지 위에 펼쳐놓는다. 보자기 위에 실록을 올려놓는데 먼저 부록부터 궤의 밑바닥에 넣고 수권(首卷)을 궤의 상부에 오도록 차례차례 넣는다. 이어 홍정주사폭보를 접고 그 위에 저주지 반장을 덮은 다음 천궁, 창포가루 부대 하나를 넣고 궤의 덮개를 닫는다. 저주지로 자물쇠를 봉하고 “년월일신 근봉”(年月日臣 謹封)이라고 쓴다. 신자(臣字) 아래에는 총재관(總裁官)이 선함(着銜)한다. 자물쇠의 열쇠에도 저주지로 줄을 만들어 두르고 “신 근봉”(臣 謹封)이라 쓰고 신자(臣字) 아래에 총재관이 착함한 다음 자물쇠의 중간에 매달아 임시로 배안탁(排案卓) 위에 안치해둔다. 이렇게 봉과된 실록은 춘추관 사고와 외사고에 각각 봉안된다.

춘추관사고에 봉안할 때는 봉과가 끝난 어람용 부록을 넣은 궤와 실록을 넣은 궤를 각각 채여(彩轝)에 싣고 붉은 보자기로 덮어놓는다. 초초(初草), 중초(中草), 초견본(初見本), 재견본(再見本)은 시렁위에 싣고 붉은 보자기로 덮고 붉은 끈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놓았다. 봉안일이 되면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의 총재관(總裁官), 당상(堂上), 도청(都廳), 낭청(郎廳) 및 춘추관(春秋館) 당상(堂上)은 흑단령을 입고, 실록청에 모여서 봉안의식을 위해 인정전 서서(仁政殿 西序) 즉 예문관(藝文館)의 누상고(樓上庫)에 있는 춘추관 사고로 향해 행진해간다. 준비가 다 되면 행진을 해서 춘춘관 사고에 당도하는데 악대는 정렬시키지만 연주는 하지 않았다. 상마대(上馬臺) 및 인노군(引路軍)이 선두에서 인도하며 의장(儀仗), 향정(香亭), 악대(樂隊)의 순으로 행진하였다.

총재관 이하 모든 당상과 도청이 춘추관 동쪽 정원에 도달하면 순서대로 정렬하였다. 사고에 숙배(肅拜)할 때 찬의(贊儀)가 《사배》(四拜)라고 외치면 총재관 이하 모두 네 번 절하였다. 절이 끝나면 낭청이 충찬위(忠贊尉)의 도움을 받아 실록궤를 춘추관의 대청 위에 임시로 안치한다. 총재관 이하 관원이 건물에 올라서면 춘추관 관원이 사고의 문을 열어 실록궤를 봉안하였다. 이어 사고를 봉인한 다음 총재관 이하 물러났다. 이와 같은 절차로 실록을 춘추관사고에 봉안하였다.

춘추관 사고에 봉안하는 의식에는 실록청의 총재관, 도청의 당상, 낭청, 춘추관의 당상이 모두 나가서 봉안하는 것과는 달리 외사고에 봉안할 때는 봉안사와 종사관 몇 명만을 보냈다. 봉안사로는 대개 춘추관의 당상관 1명과 기사관 1명이 파견되는데 이때 한강가에서 의온(宜醞)과 사락(賜樂) 즉 주락(酒樂)을 하사하였다. 당상이 파견될 때는 왕이 주악을 하사하지만 기사관만이 파견되는 포쇄시에는 주악을 하사하지 않았다. 사고에 이르러 봉안사가 흑단령을 입고 사배하는 것은 춘추관에 봉안하는 것과 같다.

종사관(從事官)으로는 봉안사(奉安使)와 함께 관상감(觀象監) 관원(官員)이 파견되었고, 이외에도 서리(書吏), 고직(庫直), 영리(營吏), 마두(馬頭), 성조색(成助色), 예방(禮房), 도색(都色), 중방(中房) 등이 파견되었다. 실록봉안사가 가는 연도에는 그에 마땅한 의식이 있었다. 대개 전후 사대(射隊) 3초(哨), 련(輦)을 호위하는 군사와 전후 사대(射隊)가 동원되었으며, 자기 경계에서 대기하고 있던 감사(監司)에게 선전관(宣傳官)이 표신(標信)과 병부(兵符)로 알려주었다. 조선시대에 모두 634회 사고를 개고하였는데 봉안할 때 개고한 것은 120회였다.



3-2. 사각(史閣)의 봉심(奉審)과 수호(守護)



사각과 봉안된 실록이 이외의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봉심하고 수호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읍성 내에 사고를 건립하고 지방관청에서 수호하게 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을 매우 소략하기만 하다. 즉 충주사고를 수호하던 사람은 수호관(守護官) 5명, 별색호장(別色戶長), 기관(記官)과 고직(庫直)이 각 1명이었다. 이는 산중에 건립된 외사고에 실록을 봉안하던 고려의 제도와는 달리 읍성 안에 건립된 사고에 봉안했기 때문에 지방관아에서 수호했으며, 따라서 수호군사의 수가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와 성주사고도 읍성 내에 설치되었으므로 충주사고와 대동이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은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임진왜란 후에는 무뢰배가 사각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게 하기 위해 험준한 산중에 건립하였으므로 사각과 실록의 수호를 위한 대책을 더욱 엄중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선조 39(1606)년 예조와 춘추관의 관원이 협의하여 중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사각의 봉심은 참봉(參奉)의 담당이었다. 행정적으로 사각을 관리하는 자는 참봉(參奉)이었으며 이들은 사각이 있는 도에서 차출하였다. 강우량이 많거나 바람이 심하여 실록각(實錄閣)에 비가 새어들어 막중한 사적의 손상이 염려된 경우 참봉은 사각을 봉심하고 보고하여야 했다. 사각에 이상이 있거나 비가 샌 곳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춘추관은 사관을 파견하여 실록각을 봉심하고 수개하였다. 이때도 서적을 거풍하고 점검하였다. 사고마다 2명의 참봉이 교대로 수직하였는데 1년마다 교체되었다. 참봉에게는 예조에서 첩문(帖文)을 보내었다. 참봉 2명의 봉급은 6두(斗)의 태미(太米)였다. 또한 사고 인근에 사는 착실한 백성 4호를 택해 일체의 신역(身役)이나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오로지 사고만 책임지고 수직하되 2명씩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또한 사각의 수호는 실록수호사찰(實錄守護寺刹)의 총섭(總攝)과 승군(僧軍)의 담당이었다. 승군(僧軍)은 사고마다 40명을 정원으로 하여 20명씩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이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예조에 보내는데, 예조에서는 수직자에게 첩문을 보내고 그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총섭(總攝)을 임명하고 수직을 통솔하게 하였다. 위의 규정을 어긴다면 각관의 수령들이 증벌을 받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을 승직으로서 실록수호사찰의 주지가 담당하였다. 외방사고의 수호사찰은 월정사(月精寺)가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을, 안국사(安國寺)가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를, 전등사(傳燈寺)가 사족산사고(鼎足山史庫)를, 각화사(覺華寺)가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담당하였다. 이 중 전등사의 총섭이 최고책임자인 도총섭(都摠攝)이었다.

복인실록(複印實錄)을 분장한 초기에는 경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과 같이 엄격하게 시행했겠으나 시일의 경과로 차차 해이해지게 되었다. 즉 사고에 소속된 승려, 역졸과 군사는 그 신역과 잡역이 면제되었는데도 신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승군도 위전을 뺏기게 되었다. 이에 인조 7(1629)년 월정사 승려 응원(應元) 등이 이의를 제기함으로 예조(禮曹)에서 완문(完文)을 보내 절목의 규정과 같이 지킬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또 지역에 따라서는 흉년으로 승도가 이산되고 사찰은 황폐되어, 사고는 막중하나 수직할 승도가 없게 되었다. 숙종 43(1717)년에 다시금 춘추관 당상이 회동하여 경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을 마련하게 되엇는데 그 내용은 선조 39(1606)년 사고절목(史庫節目)과 대동소이 하다.

그러나 조선말이 되자 이들 사목은 또다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사고에 소속된 승려, 역졸, 군사는 신역과 잡역이 면제되었는데도 신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승군도 위전을 뺏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고관리경비는 인근 읍에서 내는 조세로 충당하게 되었다. 참봉의 관료나 승려의 위전 지급이 사목대로 준용되지 않음은 국가재정의 궁핍과 문란에서 온 것이었다.



4. 조선실록(朝鮮實錄)의 보호(保護)



조선중기까지 사고에 봉안된 실록은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세종 28(1446)년 춘추관과 사고의 문서를 과거(科擧)의 식년(式年)과 같이 정기적으로 포쇄하도록 정하고 3년마다 포쇄를 하였다. 정기적인 포쇄와 점검은 단순히 실록의 습기를 제거하기 이해 거풍하면서 점검한 것이다. 경중에서 지리적으로 먼 사고의 실록은 주로 정기적으로 포쇄하고 점검한 경우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강화사고의 경우는 정기적인 점검보다 부정기적인 점검이 3배에 육박할 정도로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어떤 목적을 수행했을 지라도 실록각의 문을 열 때는 항상 먼저 개고일시를 추택하였다.

부정기적으로 행한 점검은 실록의 봉안(奉安), 고출(考出), 이안(移安), 취래(取來), 봉심(奉審), 염납(染蠟), 개궤(改櫃). 개사(改絲), 개장(改裝), 등출(謄出)과 실록각(實錄閣)의 수개(修改)를 할 때 포쇄하면서 시행되었다. 부정기적인 개고와 점검 가운데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이 고출(考出)할 때이다. 고출은 대사를 수행함에 참고할 전례를 구하지 못했을 때 실록이나 사고에 수장된 서적에서 필요한 기사를 초록해 오도록 파견한 것을 말한다. 정족산사고의 실록이 가장 많이 고출되었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강화도가 경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정족산의 사책이 산일된 결과 형지안을 살펴 필요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지 않을 때는 포쇄, 봉안, 수개와 겸해서 태백산사고나 적상산사고에서도 고출하였다.

고출 다음으로 많이 시행된 것은 실록의 편찬이 끝나 사고에 봉안(奉安)할 때이다. 실록 이외에 어제, 어필과 관인본도 봉안하였다. 이안과 환안(還安)은 신설사고로 이봉할 경우, 난을 피해 다니다가 사고에 환안한 경우, 실록을 복인하고 환안한 경우, 화재나 중수를 위해 다른 곳에 옮겨놓았다가 다시 옮겨 놓은 경우였다. 정족산사고의 실록은 염납(染蠟), 개궤(改櫃), 개사(改絲), 개장(改裝)하면서 점검한 바도 있다. 또한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등출(謄出) 하면서 점검하고 포쇄를 하였다. 이외에 형지안(形止案)을 살펴 필요한 서적이 수장되어 있을 때는 정무의 참고를 위해 경중으로 가져온 취래의 경우에도 점검하였다.

사각에 당도한 사관은 흑단령을 입고 실록각 앞에서 사배를 한 후 사고 출입문의 봉인을 확인한 후 개고하였다. 대체로 외방사고의 상층에는 열성조(列聖朝)의 실록(實錄), 어제(御製)와 지상(誌狀)이 봉안되었고, 하층에는 각 도감의궤(都監儀軌)나 관인본이 수장되었다. 사각문을 연 후에는 서책궤의 이상유무를 점검한 연후에 궤를 열었다. 포쇄할 때에는 승군(僧軍)이 실록각의 뜰로 들어내어서 포새를 하였다. 사고에 따라서는 폭쇄청(曝曬廳)(에서 포쇄하였다. 사각 뜰에서 포쇄할 때는 차일을 쳐서 직사광선을 피해 그늘에서 습기를 말렸다.

포쇄와 점검이 끝나면 다시 궤에 서적, 방충과 방습용의 물품을 넣고 사각에 봉안하였다. 서책을 궤에 넣을 때는 책과 책 사이에 초주지(草注紙)를 2장씩 넣고, 천궁(川芎)과 창포말(菖蒲末)도 넣은 후 붉은 보자기나 세모시 보자기로 싸고 그 위에 기름종이인 油芚(유둔)을 덮었다. 외3사고의 실록을 포쇄할 때 소요되는 물종(物種)은 당해 도에서 마련하였다. 또한 사각 문밖에서 도장을 찍어 봉하고 《모일인봉》(某日印封)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사관 이이는 개고하지 못하도록 봉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충해)蟲害와 (부식)腐蝕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사고의 실록을 포쇄하기 위하여 사관을 파견할 때는 주로 한림(翰林) 즉 예문관(禮文館) 관원으로서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한 자를 보냈다. 한림 외에 별겸춘추(別兼春秋)는 파견디었지만, 지방관인 외춘추(外春秋)는 사고를 개고할 수 없었다. 한편 사고에 비가 샌 곳이 있어도 외춘추는 사각의 출입문을 열고 수리할 수 없었다. 반드시 참봉이 보고를 받은 수령이 도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가 중앙에 보고하면 사관이 와서 수개하였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관리한 것은 지방수령이 사고를 개폐할 경우 사고를 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조선시대에 모두 634회 사고를 개고하였는데 포쇄 267회, 고출 161회 순으로 많이 개고되었다. 외사고에 파견된 사관은 주목적을 수행한 후 실록과 수장 문헌의 유무와 상태를 점검하고 당해 사고의 『실록폭쇄형지안』(實錄曝曬形止案)을 작성하였다. 형지안은 실록을 봉안할 때 이외에도 포쇄, 봉심, 이안, 취래, 고출 및 실록각의 수개시에 점검하고 이상 유무를 기록해서 작성한 보고용의 목록인데, 현대적인 의미로는 사고장서실태조사보고서(史庫藏書實態調査報告書)이다.

실록을 봉안할 때의 형지안에는 포쇄, 고출, 봉심시에 작성한 다른 형지안과는 달리 봉안되는 실록의 서명, 궤수, 권수, 책수, 실록찬수관원의 관직명, 성명, 수결등이 기록되고 관인이 날인된다. 봉안형지안의 1건만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건을 작성하였다. 이는 봉안할 때에 형지안을 5건 필사하여 5사고에 실록과 함께 분장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봉안 이외의 목적으로 점검했을 때에는 사고마다 적어도 2건을 작성해서 1건은 당해사고에 보관하고 1건은 국와에게 보고하였다.

전래되는 형지안은 전주사고 2책, 해주 사고 1책, 향산사고 12책, 오대산 102책, 적상산 104책, 강화사고142회, 태백산 99책, 도합 462책으로 강화사고의 형지안이 가장 많이 전래되어 있다. 형지안의 내용은 실록질(實錄秩), 서책질(書冊秩), 의궤질(儀軌秩), 형지안질(形止案秩)과 권말(卷末)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록질에는 서명, 궤수, 책수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정족산사고의 형지안에는 실록의 낙권, 낙장, 염랍, 재필사, 개장, 개사 등도 기록되어있다. 서책질에는 서명, 책수, 권수, 봉안년월일, 상송년월일, 낙권여부, 결본이 기록되어 있다. 서책질에 수록된 서책은 대개 관인본이다. 서적마다 봉안년월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간행년도를 알 수 없는 관인본은 이를 통해 간행년도를 추정할 수 있다. 의궤질과 형지안질에도 봉안년월일이 기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포쇄년월 봉명관의 직명, 성명과 수결이 있고, 장마다 봉명관의 품계에 따라[모품봉사지인](某品奉使之印)또는[봉사지인](奉使之印)이란 관인이 날인되어 있기도 하다.



5. 조선실록(朝鮮實錄)의 복원(復元)



5-1. 실록(實錄)의 복원(復元)



임진왜란으로 다른 실록은 소실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본만이 재난을 면하게 되자 그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자 선조 27(1594)년 9월부터 실록의 부본필사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선조 28(1595)년 11월, 선조 30(1597)년 4월, 선조 34(1601)년 정월 등 여러 차례 필사해서 복본을 제작하려는 논의를 하였다.

그러다가 실록은 대개 활자를 사용하여 인출하였으므로, 평시와 같지는 않으나 교서관(校書館) 수장의 주자(鑄字)와 신구활자(新舊活字)를 서로 보충해서 사용하면 5년 이내에 3건을 인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2년에 1건을 겨우 필사하기보다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선조도 권질이 적지 않은 서역(書役)을 섣불리 문관이 필사하다가는 성사할 수 없을 것이고, 아물며 1건에 머물지 않으니 강화에 설국하여 인출하느니만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선조 36(1603) 5월 춘추관에서는 다시 상의하여 실록은 강화에 봉안해두고 그 권수를 헤아려 순차적으로 경중으로 가져와서 인출하고, 인쇄가 완성된 후 강화로 호장할 것을 정하였다. 이에 설국장소는 경중 남별관(南別官)이 가장 적당하지만, 중국사신이 그 사이에 도래할 것이므로 강화에서 가져온 실록은 잠시 남별궁의 정실에 임시로 안치하고, 화재의 위험이 없는 병조(兵曹)의 관창을 인출처로 정하였다. 이로서 실록을 묘향산에서 강화로 이봉하고 순차적으로 간행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실록복인에 필요한 장소, 용지, 활자들을 모두 구비하여 작업을 시작했으니 곧 선조 36(1603)년 7월이었다.

부본실록을 인출하기 시작하여 2년이 지나자 상당히 진척되었다. 이에 선조 38년(1605)년부터 실록을 봉안할 사각을 마련하여 강화사각은 수리가 시작되었고,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사각도 적지를 물색하여 건립되고 있었다. 선조 39(1606)년 4월이 되자 신인실록이 완성되어 구본은 576책인데 비해, 신인본은 4, 5권을 1책으로 묶거나 2,3권을 1책으로 묶었으므로 259책이었고, 신구본 5건을 합하니 1,500책이 넘었다.

이외 부분적으로 복원한 경우도 있었다. 인조년간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춘추관사고본과 강화사고본의 실록이 크게 산일되어 두 사고본을 합쳐도 완질이 되지 않았다. 즉 인조 22(1644)년 8월의 보고에 마니산사고본과 춘추관사고본은 난으로 340권이 산실되어 사관을 보내 두 질을 거풍하고 산실된 권책을 필사하여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에 봉교 심세정(沈世鼎)이 강화에 파견되어 수보할 권수를 점검한 후 돌아와서 열성실록(列聖實錄) 1,025권 내에 낙권(落卷) 148권과 낙장(落張) 167권이 있으며,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신유(1621)년 8월 이후는 전무하여 권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신유년 8월 이후의 권수를 계산하니 19권이 된다. 따라서 계산상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낙권은 84권이지만 권169에 대한 착오가 있었으므로 실제의 낙권은 83권이었다.

그러나 강화사고의 실록은 이때 수보되지 못했고 현종 6(1665)년에야 수보되었다. 이는 현종 5년 11월에 강화도에 수장된 열성실록에 낙권이 있어서 완질이 아니므로 보결해야 한다고 사관 이선(李選)이 보고하며서 비롯되었다. 강화실록의 수보는 이미 인조년간부터 논의가 있었으나 흉년이 겹쳐 거행하지 못했던 바 이때 현종은 명년(6년) 정월에 적상산에서 실록을 가져와서 필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기록은 생략되었으나 다시 논의된 듯 적상산 실록을 경중으로 가져와서 필사한 것은 아니었다. 적상산 현지에서 동지춘추관사 이상진(李尙眞)과 행대교 최후상(崔後尙)이 파견되어 동 6년 교감(校勘)하고 필사하여 동 7년 정월에 강화사고에 봉안하였다. 파견된 행대교 최후상이 적상사고 옆 안국사에서 개국하여 2개월간 호남과 영남의 3도 유생 300명을 모아 추교(讎交)하고, 삼도(三道) 읍(邑)에서 재우관(宰郵官) 31명을 선발하여 필사한 것이다. 이때 태조부터 광해군까지의 낙권낙장 280권 1,389장을 합쳐짐으로써 강화도의 실록은 정비되었다.

이상진, 최후상 등이 교감한 바에 의해서도 태백산본과 동일한 적상산본에는 문자의 도치(倒置), 오자(誤字), 탈자(脫字), 첩자(疊子)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수교한 내용이 곧 정족산본의 지두(紙頭)와 지각(紙脚)에 '권원본공도(權原本恐倒)', '가원본공도(加原本恐倒)', '간원본공도(干原本恐倒)', '순원본첩(巡原本疊)', '지장지지원본공오(之掌之之元本恐誤)', '하의자원본공오(下依字元本恐誤)', '명지하원본공탈(名之下元本恐脫)', 지신하원본결(之新下元本缺)', '금금원본첩(今今原本疊)' 등등으로 필사한 작은 종이를 첨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본은 곧 적상산본을 말한다. 현종 6년 280권을 수보하는데 유생 330여명이 동원되어 2개월간 필사하였으니 이 역사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5-2. 실록(實錄)의 수보(修補)



전래하는 정족산본실록 1,187책은 표지를 주안점으로 구분하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기준으로 양분할 수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이전의 실록은 모두 원본실록이다.

정족산 수장의 『명종실록』(明宗實錄) 까지의 구 전주사고본의 원표지는 감색견(紺色絹)이다. 이 감색견 표지의 실록은 임진왜란의 병란에도 멸실되지 않고 전래된 원본실록인데, 또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을 겪었으므로 표지가 탈락되기도 하고, 철사(綴絲)가 끊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수보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구 전주사고본이다.

손상된 정족산본은 전후 4차 수보되었다. 1차는 병자호란 후 정족산본이 산일되자 이괄의 난 후 정족산사고에 이봉해두었던 복인본인 춘추관사고잔본으로 보충한 때이다. 2차는 효종 8(1657)년 『선조실록』(宣祖實錄) 14책만을 수보한 때이다. 이는 효정 4(1653)년 11월의 화재로 인해 화상을 입은 실록을 수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록으로는 극소형이다. 3차는 현종 6(1665)년에 대대적으로 수보한 때이다. 현종 5(1664)년 11월 행검열 이선(李選)이 포쇄하고 새로 제작한 실록궤에 바꾸어 넣고 돌아와서 열성실록이 완질이 되지 못하므로 수보해야 한다고 보고함으로써, 현종 6(1665)년에 필사하여 현종 7(1666)년 1월에 강화사고에 봉안하였다. 4차는 현종 7(1666)년 포쇄하면서 낙권이 있음을 발견하고 숙종 4(1678)년에 수보한 것이다. 이외에도 개장된 표지의 실록이 많은데, 개장된 경우에는 예외없이 황색의 지표지(紙表紙)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까지의 전주사고본은 감색견(紺色絹) 표지에 백색견(白色絹) 제첨(題簽)이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제첨의 서명은 목판으로 인쇄하고 권차는 책마다 다르므로 필사하였다. 개장이나 수보된 책은 감견으로 개장하지 않고 모두 황지로 개장하였다. 이를 보면 예종, 연산군, 인종의 실록의 원표지는 한 책도 없다. 현종 5(1664)년 형지안에 개장된 기록이 있으므로 이들 실록도 원래는 역시 감색견으로 장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사고본이 완전히 손상되거나 산일되어 춘추관사고본 잔부나 필사하여 보충한 수보본은 180책이다 정족산사고본일지라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후는 황지로 장황했고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제외하고는 개장되지 않았다. 황지표지인 경우는 능화문(菱花紋)이 다양하다.

개장된 실록의 경우 개장에 관한 기록도 없이 개장된 경우도 있으나, 그 기록을 남긴 때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수정한 효종 8(1657)년과 현종 5(1664)년 가을이다. 효종 8(1657)년에는 강화에서 가져온 『선조실록』(宣祖實錄) 53책 중에서 파손된 실록 25책의 철사(綴絲)를 바꾸고 28책은 개장했다. 현종 5(1664)년에 개사하고 작성한 형지안에는 개장된 153책 실록명 아래에 '신진추황의개장(申辰秋黃衣改裝)' 또는 '신진동개사(申辰冬秋改絲)'이란 주기가 있다. 개장된 438책 중 현종 5(1664)년에 개장했다는 기록이 있는 책은 371책이다. 이로서 이 이후 개장된 책도 상당히 많아 67책이 됨을 알 수 있다.

현종 5(1664)년 이후에도 철사가 끊어지면 수시로 개사했으나 그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개사의 시기를 알 수 없다. 전후 4차에 걸쳐 전체 1,187책 가운데 375책이 수보되었으니 약 1/3이 수보된 셈이다. 그만큼 임진왜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입은 손상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춘추관잔본으로 보충한 책, 효종년간과 숙종년간에 수보된 책은 모두 전권이 망실되거나 소실된 것이며, 현종년간 수보본에는 전권수보본도 있고 부분수보본도 있다. 수보본 375책 가운데 전권수보본은 177책, 부분수보본은 198책으로 부분수보본이 더 많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22(1644)년 봉교 심세정(沈世鼎)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중에는 낙권이 65권, 낙장이 2권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그 중 광해군 14(1622(년 8월 이후는 모두 낙권인데 그 권수의 다소는 알 수 없다고 상주한 바 있다. 실제로 수보했을 때의 형지안에는 수보본임이 주기되어 있다. 즉 현종 7(1666)년에 보고한 형지안에 의하면 권 6, 7 아래 '육칠권낙장신등(六七券落張新謄)'으로 주기되어 있고 권 13/16 이하 75책 아래에는 '낙권신등(落券新謄)'으로 주기되어 있다. 이로서 현종 6(1665)년에 필사하여 현종 7(1666)년 정월에 봉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권 170-187의 3책은 주의부족으로 낙원임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숙종년간에야 발견되었고 이때에야 수보될 수 있었다. 현종년간 수보된 책 가운데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실물로는 수보본임을 쉽게 식별하기 어려우나 형지안을 통해 14책이 전권수보본이며 2책이 부분수보본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방면으로 실록을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으니 곧 염랍(染蠟)한 것을 들 수 있다. 염랍된 실록은 대개 수보본을 제외한 순수한 구전주사고본이다.

강화사고본 가운데 구 전주사고본을 염랍하면서도 수보된 후대의 필사수보본과 선조 이후의 실록은 염랍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낙장이 있어 수보된 실록인 경우도 동일본 내 임진왜란 전 인출된 책장은 염랍되었으나, 수보된 책장은 염랍되지 않았다. 같은 실록일지라도 이렇듯 구 전주사고본을 한층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염랍하고 수보한 시기는 숙종 25(1699)년 3월 4월이었다. 그러나 숙종 25(1699)년 형지안은 염랍 및 수보형지안이지만 염랍된 실록에 대한 주기는 전혀 없다. 다만 현종년간 수보본에는 '낙권신등(落卷新謄)', 선조년간 복인본에는 '양소(樣小)', 문종 권11에는 '적산역락(赤裳亦落)', 복본(複本), 춘추관잔본을 이장하여 복본이 된 실록에는 '첩서(疊書)'가 주기되어 있을 뿐이다. 숙종 25(1699)년 형지안의 서명이 염랍 및 수보시의 형지안이라고 표현되고 있으므로 염랍 외에 개장하고 개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으로 실록각을 수개한 때인 숙종 27(1701)년 형지안에 납등(蠟謄), 납인(蠟印), 신등(新謄) 등의 주기가 있다. 이로서 숙종 25(1699)년에 염랍된 실록의 추적이 가능하다.

임진왜란 전의 4사고본들이 모두 동일하게 감견표지였는지 아니면 사고마다 재료와 색상이 상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복인된 실록과 그 계승본 가운데 완질이 전래되는 실록은 태백산본 실록이다. 태백산본 실록은 태조부터 선조까지 뢰문번지련보상화문(雷紋繁地蓮寶相花汶)이 있는 감지표지(紺紙表紙)이다. 이는 구 전주사고본과 같게 제작하려고 시도했으나 전후 물자가 궁핍한데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259책이나 되는 4질(기록상으로는 1,500여권)의 표지를 일시에 만들 견이 필요하였으니 아마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종이로 대체시키고 다만 종이색만 동일한 감색으로 염색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 사고본도 동일한 능화문의 표지이지만 종이색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태백산본은 간행된 후 많은 시일이 경과되지 않았고, 도성과 원거리여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의 화도 입지 않았으므로 큰 피해가 없었다. 다만 사각에 우루처가 있어서 누습된 경우는 있으나, 개장할 정도로 심한 경우는 아니었으므로 개장도 거의 없다. 태백산본은 봉안된 후 관리가 비교적 잘 되었고, 심산에 장치되었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도 없어 개장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족산본에 통합도니 잔본 춘추관본은 뢰문번지련보상화문(雷紋繁地蓮寶相花汶)이 있는 황색표지이다 오대산본도 동일한 능화문이 있는 담황색표지인데, 배접지(褙接紙)만은 일차 사용했던 폐기지(廢棄紙)를 재활용한 것이다. 오대산본은 교정쇄(校正刷)였으므로 정본과는 달리 장황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복인본의 능화문은 외사고 모두 동일한 표지의 능화문이나 표지의 색상만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본은 감색표지인데 비해, 춘추관본은 황색표지, 오대산본은 담황색박표지(淡黃色薄表紙)이지만, 적상산본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부터는 정족산본이나 태백산본을 막론하고 능화문이 있는 황지표지로 바뀌게 된다. 종이 표지로 바뀌게 됨은 당시 사회, 문화, 경제,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나,왕실의 권위가 그만큼 격하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황지표지를 사용하면서부터 능화문은 수시로 변화되었다. 이들 선조 이후의 실록은 오대산본, 적상산본의 형지안을 통해서나 실물을 통해서도 수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의 자세한 경위와 거기에 참여한 관원들의 명단 및 체제와 내용상의 차이는 앞 중초본(中草本)의 해제를 참고하기 바란다.



6.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내용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사료의 산일과 인조반정에 의하여 집권한 서인들이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적인 비판이 많이 작용하였다. 정초본이 곧 완성본이므로 이것이 곧 본래 의미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이다. 그러나 중초본(中草本)에서 삭제된 많은 내용들도 당시의 실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정보들을 담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역사 연구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 삭제되거나 보완된 내용들을 비교 분석해 보면 당시의 실록 편찬자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두 본을 종합하여 광해군대의 역사를 요약해 본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이름은 혼(琿)이며 선조(宣祖)와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있었던 4월 29일 신하들의 간청으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있었지만, 그가 총명하고 효경스럽다는 이유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날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는데, 도중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국왕과 세자가 분조(分朝)를 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아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분조 활동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일을 맡았다. 1594년에는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하였다.

1606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그의 세자 지위는 매우 위태로웠으나 정인홍 등 북인의 지원으로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다. 그가 즉위한 후에도 명에서는 한동안 고명(誥命)을 거부하여 고통을 받았다. 이 때문에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는 등 파란이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초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에는 박응서(朴應犀) 등 7서(庶)의 사건이 일어나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죽게 하였다. 1615년에는 대북파의 무고로 신경희(申景禧)와 능창군 전(綾昌君佺)을 제거하고, 1618년에는 폐모론이 일어나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 같은 실정으로 광해군은 큰 비난을 받았는데, 대부분 대북파의 책동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광해군 때는 국가 재건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시행되었다. 1608년에는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다. 1609년에는 창덕궁을 재건하였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1616년 후금(後金)이 건국되자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1619년에는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후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르허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외교적인 균형을 취하였다. 1609년에는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광해군 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였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광해군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실각하여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 서거하였다. 그는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묘호(廟號), 존호(尊號),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였고, 왕자 때 받은 봉군 작호(爵號)인 “광해군(光海君)”으로 호칭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