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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 (奎12735)
 1.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 경위와 편수관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의 재위 기간(1623.3. ~ 1649.5.) 26년 2개월 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인조대왕실록》이며, 모두 50권 50책으로 활판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외관계 등 여러 방면의 연구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에도 주요 정책과 국가적인 전례의 여러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근거자료였다. 이는 예로부터 나라에 사관을 두고 국왕의 일이라면 크게는 정사를, 작게는 언동을 상세히 기록하였다가 귀감이 되도록 하기위해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이 아닌 대신은 물론 국왕조차도 열람할 수 없는 비장의 자료인데도 빈번하게 정책의 참고용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서지학적인 관점에서 조선시대에 실록을 활용한 사정, 특히 실록을 고출한 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실록은 사관이 아니라면 대신은 물론 국왕조차도 열람할 수 없는 비장의 자료인데도 수시로 정책참고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친 경우로 실록을 고출한 년간 및 목적, 내용과 고출한 실상에 대해 살펴봄에 있어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에는 실록을 고출한 목적과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것이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자료가 많이 산실되어 참고할 자료가 없는 시기와 ㅅ간이 경과되어 전거가 마련된 시기 사이에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편의상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어 실록의 고출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 200년간 도합 45회의 고출이 있었는데 성종년간에 12회로 가장 많았고 평균적으로 4년에 한 건을 고출한 것이다. 이때는 주로 춘추관의 실록을 고출하였다. 주제는 주로 국방, 서적의 편찬, 사초, 관리비행의 순이었다. 가장 많이 고출 된 것은 국방에 관한 것인데 이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 왜관의 침입 위화도 회군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한 경각심이 조선에까지 지속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광해군까지 31년간 도합 81회의 고출이 있었던 바, 선조 16년간에 20회, 광해군 15년간 61회 고출되었다. 임란 후 복인된 춘추관사고본 실록은 68회 고출되었다. 실록을 복인 한 이후는 춘추관에 실록이 수장되었기 때문에 굳이 외방의 실록을 고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주제도 다방면에 미치는 데 세자, 존호, 제례, 관직제수, 영건 등이었다. 임진왜란은 국토방위에 있어 중대한 도전이었으므로 임진왜란 직후 국방에 관한 문제가 많이 논의되었을 것이나 실록고출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인조년간부터 현종에 이르는 52년간은 도합 55회 고출된 바, 인조 27년간 31회, 효종 10년간 8회, 현종 15년간 16회 였다. 이 기간에는 평균 1년에 1건 고출한 것이다. 고출대상 실록이 수장된 사고는 마니산 8회, 정족산 8회 태백산 2회, 적상산 7회 오대한 1회 미상 30회이다. 이 기간에는 강화사고의 실록이 주로 고출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괄의 난이 일어난 이후였으므로 춘추관의 실록이 산실되었기 때문이다. 고출한 주제도 다방면에 미쳐서 세자(世子), 상제(喪祭), 종묘(宗廟), 봉릉(奉陵)과 가례(嘉禮) 등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는 세자와 상제례의 문제를 빈번하게 고출하였음을 볼 수 있다.

실록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춘추관사고를 개고할 때 먼저 일관에게 길일과 길시를 추택하게 한 후 정해진 시각에 3인의 사관이 합석하여 열 수 있었다. 외방의 사고에는 일관을 대동하고 가서 길일과 길시를 추택해서 개고하였다. 포쇄할 때에는 1명의 사관이 수행했으나 고출의 경우는 2명의 사관이 파견되었다. 춘추관사고는 개폐할 때마다 수장된 서적을 점검하고 국왕에게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라나 외방사각은 사각을 개폐할 때마사 반드시 수장된 서적을 점검하고 《형지안(形止案)》을 작성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도한 이 《형지안(形止案)》의 부본은 해상 사고에도 수장하였다.

대체로 실록의 보관과 관리와 관련해서는 실록의 수호를 위한 사찰이 등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후에는 선조년간 실록의 복인이 마무리될 즈음 이를 분장하기 위한 준비로 새로운 사각을 건립하였다. 신설사각은 험준한 산중에 건립되었으므로 사각과 실록의 수호를 위한 대책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졔조와 춘추관의 관원이 협의하여 ‘경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을 마련하여 시행하도록 명한바 있다. 이 절목의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 실록에는 기록된 바 없다. 사고 수직 절목의 내용은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使料)’에 수록된 ‘예조완문(禮曺完文)’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사각의 운영경비인 삼봉의 관료와 스님의 위전(位田)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그 요지는 사고 인근에 사는 착실한 백성 4호를 택해 일체의 신역이나 권역을 면제시켜 오로지 사고만 책임지고 수직하되 2명씩 교대로 근무하게 한 것이었다. 또한 승군은 사고마다 40명을 정원으로 하여 20명씩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이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예조에 보내는데, 예조에서는 수직자들에게 첩문을 보내고 그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총섭(總攝)을 임명하고 수직을 통솔하게 하였다. 위의 규정을 어긴다면 각관의 수령들이 증벌을 받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록을 심산에 수장하였으므로 승군이 수직하게 되었고 이로서 사고수호에 승군이 참여하게 되는데 고려 고종년간에 해인사에 사고를 설치했던 전통이 부활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에 외사고의 수호사찰이 있게 된 연규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산의 실록을 봉안한 것은 세조년간 양성정의 건의가 선조년간에 실현된 것이며 장소만 변경된 것이다. 이 건의가 뒤늦게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을 당해 국가의 존망에 승군이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고를 심산에 설치하게 되었으니 승도의 힘이 필요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복인 실록을 분장한 초기에는 상기의 경외사고수직절목고 같이 엄격하게 규정하여 시행했겠으나 시일의 경과로 차차 해이해지게 되었다. 즉 사고에 소속된 승려, 역졸과 군사는 그 신역과 잡역이 면제되었는데도 신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승권도 위전을 뺏기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흉년이 들어 승도의 이산이 있었고, 사찰은 황폐되어 사고는 막중하나 수직할 승도가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대산사고의 실록수호총섭이었던 설정과 응원 등의 소지에 의해 인조 8년에 다시금 수직승들의 신역 및 잡역을 면제하게 하고 비록 왕능을 쌓을지라도 차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역 수호 사찰에 손상이 있으면 여러 읍에서 수리를 돕게 하였다.

인조 10년 적상산고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적상산사고에는 수직 10명(매월 12명 수직), 군병 84명(매월 7명씩 수직), 승군은 승장, 상좌 등 16명이 수직하였다 더구나 적산산성은 광해군년간에 대비해서 쌓은 군사적 요충이었기 때문에 사고수호 외에 산성수호를 위한 군사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 16년 춘추관의 보고에 의하면 태백산사고는 수목이 우거진 가운데 있어 산불의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도 관리들이 사목을 준행하지 않아 참봉은 급료도 받지 못하고 스님들은 위전을 빼앗겼다. 이 상태로는 사고수호의 허점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전례르 ㄹ조사하여 급료와 급전할 것을 청하였고 왕은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또다시 해이해졌고 숙종 43년에 다시금 춘추관 당상이 회동하여 경외사고수직절목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 마련한 절목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사고(춘추관사고)는 병조에서 담장을 수리하여 병조부장이 군사 4명과 수직하고, 또 춘추관 낭청도 1명씩 교대로 수직한다. 서리, 사령, 고직은 각 2명을 배치하는데 그들의 급료는 당해관청에서 지급한다.

2) 강화사고의 수직은 경기도 관찰사가 거행한다. 태백산과 오대산의 사고는 인근 4호의 백성을 택해 신역을 면제시켜 전적으로 사고수직만 하게 하고 승도는 사고마다 40명을 정원으로 한다. 승도 중의 우두머리에게는 수증첩문을 따로 지급하고 수직을 감독하게 한다. 또한 그 도내에 사는 학식있는 품관 2명(참봉)을 택해서 역시 신역을 면제시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의 예에 따라 양식과 급료를 지급한다 수직자 중 직무에 충실한 자는 본도의 보고에 따라 포상한다.

3) 외방사고에 탈이 있는가를 살펴서 보고하되 잡인, 무뢰한, 스님과 사당패 등은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인조 8년의 규정과 대동소이한 내용이다. 사목에 따라 수직하고 오로지 수호에만 전념하게 할 것을 재확인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목에는 적상산 사고의 수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후 또다시 해이하게 되었으니 영조 10년에 예문관 대교가 이에 대해 계한 내용에서 사정을 알 수 있다. 즉 각지 사각 근처에 반드시 사찰이 있으며 이 사찰에는 승인을 모집하여 위전을 내려주는 등 각별히 후원하였기에 의승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족산사각은 경중과 가장 가까운 까닭으로 업무차 오가는 관리의 왕래가 많아 스님의 업무가 번중하고 승도는 이를 감당할 수 없ㄱ ㅔ되어 날로 이산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다른 사찰의 승려는 아예 피해서 정족산에는 오지도 않으니 남은 승려는 10명도 안되어 몇 년 지나면 남을 승려가 없게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따라서 막중한 사각의 수호을 휘해 정족산 아래의 선두포(船頭浦)에 있는 세수 수십석지기 노을 전등사에 주면 승도가 모일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영조는 상중하 답을 막론하고 20석지기를 내려줄 것을 명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인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1650년(효종 1) 8월 1일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진행되었고 특별한 난관은 없었다. 다만 인조는 반정에 의하여 전 왕을 폐하고 즉위하였기 때문에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사용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은 1653년(효종 3) 6월에 완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관원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 영춘추관사: 이경여(李敬輿), 김육(金堉)

도청 당상(都廳堂上) 지춘추관사: 오준(吳竣), 이후원(李厚源)

동지춘추관사: 윤순지(尹順之), 조석윤(趙錫胤), 채유후(蔡裕後)

도청 낭청(都廳郞廳) 편수관: 홍명하(洪命夏), 조한영(曺漢英), 이응시(李應蓍), 김홍욱(金弘郁), 심세정(沈世鼎), 이천기(李天基), 권우, 홍처윤(洪處尹), 심지한(沈之漢), 조빈(趙贇)

기주관: 조복양(趙復陽), 홍처량(洪處亮), 정언벽(丁彦璧), 김시진(金始震), 홍처대(洪處大), 오정위(吳挺緯), 이정영(李正英), 이정기(李廷**)

기사관: 조사기(趙嗣基), 오핵, 서필원(徐必遠), 김휘(金徽), 이경휘(李慶徽), 민정중(閔鼎重), 신최(申最)

일방 당상(一房堂上) 지춘추관사: 임담, 이기조(李基祚)

동지춘추관사: 신유(申濡) 수찬관:김익희(金益熙), 이시해(李時楷)

일방 낭청(一房郞廳) 편수관: 이해창(李海昌), 성이성(成以性), 이홍연(李弘淵), 이석(李晳)

기주관:정유(鄭攸)기사관:홍중보(洪重普), 김종일(金宗一)

이방 당상(二房堂上) 동지춘추관사: 여이징(呂爾徵)

수찬관: 이일상(李一相), 황감

이방 낭청(二房郞廳) 편수관: 유도삼(柳道三), 변시익(卞時益)

기주관: 채충원(蔡忠元), 홍수, 김좌명(金佐明), 이경억(李慶億)

기사관:조구석(趙龜錫)

삼방 당상(三房堂上) 지춘추관사: 한흥일(韓興一), 박연(朴筵)

동지춘추관사: 신익전(申翊全)

수찬관: 유황(兪榥), 조수익(趙壽益), 이지항(李之恒), 이행진(李行進), 남노성(南老星)

삼방 낭청(三房郞廳) 편수관: 엄정구(嚴鼎耈), 정지화(鄭知和), 곽지흠(郭之欽)

기주관:이항(李杭), 이후

기사관:장차주(張次周), 신혼(申混)

(이상 69명)



2. 《인조실록(仁祖實錄)》의 내용



인조(仁祖: 1595~1649)의 휘(諱)는 종(倧)이며, 자는 화백(和伯)이다. 아버지는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부(琈: 후에 元宗으로 추존)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이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능양군(綾陽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인조는 즉위 직후에 민심의 수습을 위해 12개의 도감(都監)을 혁파하고, 여러 죄인들을 사면하였으며, 각종 토목 공사를 중지하였다. 왕실의 척족이나 권신들의 전장(田庄)과 감세•복호(復戶) 등을 조사•개혁하며, 내수사(內需司)•대방군(大房君)에 빼앗긴 민전을 일일이 환급하도록 하였다.

반정 이후 논공 행상에서 공이 컸던 이괄(李适)을 2등공신으로 녹공하여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였다.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에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까지 남천(南遷)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반군이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격파되고 진압되자 서울로 환도하였다.

인조 대에는 대북파가 대부분 제거되고 반정의 주역이었던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광해군 때 조정에서 축출당했거나 퇴거하고 있던 남인 계열 인사들 및 재야 사림들이 주로 등용되었다. 인조대의 이러한 인재등용은 정국 운영에 중요한 계기가 되고, 붕당간의 세력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써서 탄력있는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인조와 서인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중시하여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썼다. 그 결과 1627년(인조 5)에 정묘 호란(丁卯胡亂)을 초래하였다. 이때 후금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왔다. 이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최명길(崔鳴吉)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요구는 더욱 심해지고, 1636년에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하며 압박하였다. 조선이 이 제의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12월에 10만여의 군사를 이끌고 재차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조정은 제대로 방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에서 항거하였다. 이때 강화 문제를 두고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여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임란 이후 다소 회복되어 가던 국가 재정과 민생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사회상은 매우 비참하였다. 1644년 청이 중원을 점령하자 다음 해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곧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숙종때 예송(禮訟)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후에 인조는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를 죄에 엮어 사사(賜死)하였다.

인조대의 중요한 치적은 아래와 같다.

먼저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던 대동법(大同法)을 1623년에 강원도에 확대 실시하여 점차 지역을 넓혀나갔고, 1624년에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여 국방에 대비하였다. 1633년에는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청 나라와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였다. 함경도의 회령 및 경원 개시(慶遠開市),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하여졌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세원(稅源)을 확보하였고,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 구분의 전세법(田稅法: 貢法)을 폐지하고, 최하등급의 토지를 기준으로 전세를 통일하여 고정시킨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하였다.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하여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孼許通)과 속죄를 실시하였다.

1628년에는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한 화란인(和蘭人) 벨테브레(朴淵, 朴燕으로 표기)를 훈련 대장 구인후(具仁垕)의 휘하에 배치하여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정두원(鄭斗源)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화포, 천리경(千里鏡),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며, 특히 소현세자는 천주교 선교사 탕약망(湯若望)과 사귀기도 하였다. 송인룡(宋仁龍), 김상범(金尙範) 등은 청나라에서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수입하였고, 이는 1653년(효종 4)에 시행되었다. 인조는 학문을 장려하여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을 간행하였고, 김장생(金長生), 장현광(張顯光),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육(金堉) 등 우수한 학자들을 육성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도록 하였다.

인조는 26년간 군림한 후 1649년 5월 8일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는 인조(仁祖), 존호는 헌문열무명숙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이며, 능은 장릉(長陵)으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