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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 (奎12737)
 1. 《현종실록(顯宗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현종실록(顯宗實錄)》은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顯宗)의 재위 기간(1659년 5월 ~ 1674년 8월) 15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이름은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이다. 현종의 실록은 두 종류가 편찬•간행되었는데,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 그것이다.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숙종 1~3년에 편찬되어 모두 22권으로 간행되었고,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서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 6~9년에 28권으로 편찬•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은 현종이 승하한 익년 숙종 1년(1675) 5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실록청이 설치되고 영의정 허적(許積)이 총재관이 되어 편찬 인원을 구성하였다. 숙종 3년 2월에는 당상과 낭청의 인원을 늘이고 편찬에 박차를 가하여 5월 9일에 찬수를 마쳤다. 실록의 인출(印出)을 앞두고 허적이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여 숙종 3년 5월 10일부터 좌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이를 맡아 5월 23일부터 간행을 시작하고 우의정 민점(閔點)이 최종적으로 검열을 하였다. 행장(行狀),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숭릉지(崇陵誌)를 부록으로 실어 9월 3일에 간행을 마치고 사고에 봉안하였다. 실록 편찬에 참가한 찬수관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도청 당상(都廳堂上): 김석주(金錫胄), 오시수(吳始壽), 민점(閔點), 홍우원(洪宇遠), 이관징(李觀徵), 이당규(李堂揆)

도청 낭청(都廳郞廳): 유명현(柳命賢), 강석빈(姜碩賓), 이항(李沆), 유하익(兪夏益), 권유(權愈), 육창명(陸昌明), 육임유(陸林儒), 이담명(李聃命), 오시대(吳始大), 최석정(崔錫鼎)

일방 당상(一房堂上): 오정위(吳挺緯), 이홍연(李弘淵), 홍처대(洪處大), 윤심(尹深)

일방 낭청(一房郞廳): 이수만(李壽曼), 이하진(李夏鎭), 권해, 유명천(柳命天), 윤지선(尹趾善)

이방 당상(二房堂上): 민희(閔熙), 김우형(金宇亨), 목내선(睦來善), 정석(鄭晳)

이방 낭청(二房郞廳): 오정창(吳挺昌), 곽제화(郭齊華), 이덕주(李德周), 이일정(李日井), 권환

삼방 당상(三房堂上): 김휘(金徽), 이무, 이우정(李宇鼎)

삼방 낭청(三房郞廳): 조사기(趙嗣基), 임상원(任相元), 김환(金奐), 이수경(李壽慶), 오시복(吳始復), 이유(李濡)

등록 낭청(謄錄郞廳): 유성삼(柳星三), 유정휘(柳挺輝), 김두명(金斗明), 이국화(李國華), 이후정(李后定), 유하겸(兪夏謙), 박진규(朴鎭圭), 심벌, 이명은(李命殷), 이정만(李挺晩), 김원섭(金元燮), 정환(鄭煥), 성석신(成碩藎), 권규(權珪), 박경후(朴慶後), 안여악(安如岳), 이태귀(李泰龜), 강선(姜銑), 이세익(李世益), 유수방(柳壽芳)



2. 《현종실록(顯宗實錄)》의 내용



현종(顯宗: 1641~1674)의 이름은 연(鮟), 자는 경직(景直)이며,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맏아들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탄생하였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현종은 즉위하자 바로 복제(服制) 문제에 직면하였다. 효종의 상(喪)에 입을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복제가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시열(宋時烈) 등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라 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는 효종이 대통을 계승하여 군림하였다는 이유로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조정으로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은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익년 2월에 허목(許穆)이 《의례》의 주소(註疏)를 근거로 다시 장자 3년설을 주장하여 격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서인들의 주장이 우세하여 기년복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1674년 2월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대두하였다. 《경국대전》에 아들에 대한 복제는 장자와 차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자부에 대한 복제는 장자부 기년, 중자부(衆子婦) 대공(大功)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예송은 남인이 촉발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서인과 국왕 사이에 전개되었다. 현종이 남인들의 예설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었고, 서인들이 문책을 받아 실세하자 1675년에는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종실록(顯宗實錄)》에는 복제 예송에 관한 기사가 대단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현종 대에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1662년(현종 3)에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였고, 양역변통(良役變通)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자연재해가 심하여 민생의 고통이 심하였다. 1666년에는 난파인 하멜(Hamel,H.) 등이 일본으로 탈출하였고, 1668년에는 동철활자(銅鐵活字) 10여 만자를 주조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 연구에 사용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는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설치해 급료병을 축소시켜 재정을 절약하고자 하였다. 1682년 정초청(精抄廳)과 합쳐 금위영(禁衛營)이 되었다.

현종 대 15년 간에는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중심이 된 산당(山黨) 계통의 서인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김육(金堉) 일가를 중심으로 한 한당(漢黨)과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현종은 처음에는 송시열•송준길 등을 존중하여 예우하였으나 말년에는 싫증을 내어, 남인 허적(許積)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인척이었던 동복오씨(同福吳氏) 그리고 김석주(金錫冑)를 비롯한 청풍김씨(淸風金氏) 외척 세력을 중용하였다. 이들은 1674년의 제2차 예송에서 기년설을 지지하여 서인정권을 축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현종은 제2차 예송이 귀결된 직후 병으로 훙서하였다. 존호는 소휴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純文肅武敬仁彰孝), 묘호는 현종(顯宗),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3. 《현종실록》 총서



왕의 휘는 원(棩), 자는 경직(景直)으로 효종 현인 대왕의 맏아들이고 인조 명숙 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효숙 경렬 명헌 인선 왕후 장씨(張氏)인데, 【우의정 신풍 부원군 장유(張維)의 딸임.】 명나라 숭정(崇禎) 14년 2월 4일(기유) 축시에 심양(瀋陽)의 질관(質館)에서 왕이 탄생하였다. 갑신년 에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왔고, 을유년에 소현 세자가 죽어 효종이 차적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되자 왕 역시 원손(元孫) 칭호가 올려졌으며, 기축년에 왕세손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그해 여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사위하자 왕도 왕세자 칭호가 올려졌고, 신묘년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는 이어 왕세자 책봉례를 거행하였으며, 겨울에 세자 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 김우명(金佑明)의 딸을 책봉하여 왕세자 빈을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 삼았다. 기해년 5월에 이르러 효종이 승하하고 왕이 뒤를 이었다.



4.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의 편찬 경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실록≫을 추후에 수정한 역사서로, 정식 이름은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이다. 모두 28권 29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실록의 수정이나 개수는 선조 실록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는 당시의 심각했던 당쟁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각기 편찬 주도 세력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숙종 초에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민점(閔點) 등 남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현종실록(顯宗實錄)》에 서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이념투쟁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예송(禮訟) 문제에 서인들을 폄하하고 비난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5.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배경



1674년 8월 18일에 승하한 현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문제는 9개월 가량이 지난 1675년(숙종 1) 5월에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숙종 즉위 직후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남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이 남인의 우세로 일단락된 시점으로, 현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주로 남인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종대의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록의 편찬에 앞서서 이미 현종의 묘지(墓誌)와 행장(行狀)을 짓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되었었다. 《숙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숙종은 현종의 장례식 준비가 진행되던 1674년 9월에 송시열(宋時烈)에게 현종의 묘지를 짓게 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단하(李端夏)에게 현종의 행장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에 대해 남인들은 현종 말년에 예송(禮訟)에서 패했던 송시열이 현종의 묘지를 짓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고, 송시열은 이러한 남인들의 반발을 구실로 묘지 짓는 것을 사양하여 결국 현종의 묘지는 김양주(金陽冑)가 짓게 되었다. 이단하가 찬술하기로 한 행장 역시 1674년 11월 11일에 일차로 완성되었지만 그 내용을 둘러싸고 남인측으로부터 수정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즉, 현종대의 예송에 관한 서술에는 송시열의 잘못을 명기하지 않은 데 불만을 가진 남인들은 복제와 관련된 서술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숙종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이단하에게 수정을 명하였다. 이단하가 국왕의 강요에 의해 송시열이 예제를 그르쳤다는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하였지만, 이번에는 서인들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본래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이단하가 얼마 후 자신의 수정이 적절치 않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자 송시열을 옹호하는 서인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숙종은 이를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처럼 현종대의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산 남인과 서인의 대립은 국왕의 지원을 받은 남인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갔는데, 현종의 실록 편찬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실록은 본래 대제학이 주관하게 되어 있었는데, 대제학을 맡고 있던 이단하가 행장의 찬술 문제로 국왕의 비난을 받은 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실록의 찬술은 시작되지 못하였고, 1675년 5월 16일에 김석주가 후임으로 대제학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실록의 편찬이 시작될 수 있었다.

한편, 이단하가 수정했던 현종의 행장은 실록의 편찬이 시작된 후 다시 찬술되게 되었다. 남인들이 행장을 고칠 것을 요구하자 국왕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남인의 산림으로 중앙에 초빙되어 있던 윤휴(尹鑴)에게 행장을 다시 짓도록 하였고, 윤휴는 다음해 3월 4일에 이를 일단 완성한 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5월 27일에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때 찬술된 현종의 행장은 묘지 및 애책 등과 함께 현종실록의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6.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와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과정



1675년 5월부터 1677년 9월까지 2년 4개월에 걸친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과정은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직후에 실록 편찬을 담당했던 실록찬수청 관원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실록이 편찬되기까지의 작업 과정 및 실록 편찬에 이용된 여러 가지 물자의 종류와 조달 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먼저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의 체재에 대해 살펴본 후 여기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6-1.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顯宗大王實錄纂修聽儀軌)》의 체재와 현존 의궤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顯宗大王實錄纂修聽儀軌)》에는 후대의 의궤와 달리 목차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항목의 이름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일단 내용에 따라 항목을 나누고 기록된 순서대로 목차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啓辭, 移文秩 甘結秩 印出諸具 實錄廳書啓 襃賞備忘記 宣醞節次 宣醞後進箋儀 都廳員役 및 印出匠人 一房謄錄 二房謄錄 三房謄錄 粉板謄錄廳謄錄 別工作謄錄 實錄廳 都廳官員의 具銜 및 署名



이중 《계사(啓辭)》에서 《도청원역(都廳員役) 및 인출장인(印出匠人) 명단》까지는 실록찬수청도청(實錄纂修廳都廳)의 업무와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부분이고 《일방등록(一房謄錄)》 이하는 도청의 하부 부서의 작업 내용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부분이다. 《계사》에는 실록 편찬 작업이 시작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실록찬수와 관련하여 국왕에게 올린 계와 국왕의 실록청에 대한 지시사항 등이 정리되어 있고, 《이문질(移文秩)》과 《감결질(甘結秩)》에는 실록청에서 각 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고 물자의 조달을 지시한 문서의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인출제구(印出諸具)》에는 실록 인출 작업에 사용된 물자와 장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실록청서계(實錄廳書啓)》에는 실록청에서 근무한 관원들의 임면 날짜와 근무 일수가 정리되어 있다. 《포상비망기(襃賞備忘記)》, 《선온절차(宣醞節次)》, 《선온후진전의(宣醞後進箋儀)》 등에는 실록 편찬을 완료한 후에 실록청의 관원 및 보조인원, 장인들에게 내려진 포상 내용과 세초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도청원역 및 인출장인 명단》에는 실록찬수청 도청에 소속된 관원과 보조인원, 그리고 인출 작업을 담당한 장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일방등록(一房謄錄)》, 《이방등록(二房謄錄)》, 《三房謄錄(三房謄錄)》, 《분판등록청등록(粉板謄錄廳謄錄)》 등에는 실록 편찬 작업의 초기에 원사료들의 산절(刪節)을 담당했던 1방, 2방, 3방 등의 각방과 찬수된 실록 초고의 정서를 담당했던 실록청 등이 각기 필요한 물자를 요청하기 위해 다른 기관에 보낸 문서의 내용과 각각에 소속되었던 관원과 하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별공작등록(別工作謄錄)》에는 실록청에서 필요한 물품의 제작을 담당했던 별공작에서 제작한 물건들의 내역과 담당 관원 및 장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의궤의 마지막 장에는 실록 편찬이 완성된 시점의 실록청 총재관과 도청당상, 도청낭청 등의 구함(具銜) 및 서명(署名)이 적혀 있다.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는 처음에 5부가 제작되어 실록과 함께 각지의 사고에 봉안되었는데, 이중 3부가 전해지고 있다. 규장각에 태백산사고와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2부가 소장되어 있으며, 장서각에 적상산사고에 보관되었던 1부가 소장되어 있다. 활자로 인출한 실록과 달리 의궤는 필사본으로 제작되었는데, 책에 따라 수록된 내용과 기록하는 양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규장각에 소장된 2부를 비교하자면 오대산사고본에는 1677년 9월 20일까지 사항만 기록되어 있지만, 태백산사고본에는 1677년 10월에 발급한 문서의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1677년 9얼 18일 실록청에서 호조에 보낸 문서는 태백산사고본의 경우 《이문질》에 수록되어 있지만, 오대산사고본에는 《감결질》에 수록되어 있다. 문서의 성격상 《감결질》에 수록될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오대산사고본의 경우 이미 작성된 《이문질》 여백이 없어 《감결질》의 말미에 적은 적으로 생각된다. 기사의 수록 순서에 있어서도 두 책은 차이가 있다. 실록 편찬이 완료된 이후 선온에 참가할 실록청 관원들의 이름을 적은 명단의 경우 오대산사고본에는 《감결질》의 1677년 9월 12일 기사 바로 뒤에 수록되어 있지만 태백산사고본은 1677년 9월 18일 기사 뒤에 수록되어 있다. 1677년 9월 12일의 감결에 의정부에서의 선온에 참석할 관원들의 명단을 기록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오대산사고본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오대산사고본의 《감결질》 바로 뒤에 실록에 사용된 물자의 내역을 정리한 《인출제구》의 항목을 두고 있지만, 태백산사고본의 《감결질》의 뒤에 실록청에 근무한 관원들과 근무 일자를 기록한 《실록청서계》와 실록 찬수 이후의 관원들에 대한 포상 및 선온 관련기사를 두고 《인출제구》는 그 뒤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참여한 보조인원의 명단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울러 동일한 기사에서도 내용의 자세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677년 9월 20일 실록청 관원들이 선온 이후 올린 시전의 찬술자가 오대산사고본에는 '대제학 민점(閔點)'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태백산사고본에는 빠져 있다. 또한 오대산사고본에 기록되어 있는 세주 중 일부가 태백산사고본에 빠진 것들이 있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실록청의 관원 명단에 있어서도 오대산사고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 당상 4인, 낭청 4인 총 9인 모두의 수결이 적혀 있지만, 태백산본에는 총재관, 당상 1인, 낭청 1인 등 3인의 수결만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오대산사고본이더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록 양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오대산사고본에서는 사용된 물자 등을 나열할 때 하나씩 행을 바꾸어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태백산사고본은 행을 바꾸지 않고 연이어 쓴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6-2.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과정



이하에는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웨(顯宗大王實錄纂修聽儀軌)》(이하 《의궤》)의 내용에 의거하여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



(1) 실록청의 설치와 관원의 임명



실록의 편찬 작업은 실록청을 설치하고 담당 관원을 선발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의궤》의 내용 역시 이러한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1675년 5월 18일에 승정원에서 실록청의 총재관을 차출하자는 계를 올리고 그에 따라 다음날 영의정 허적(許積)이 총재관으로 임명되면서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그후 5월 28일에는 춘추관에서 총재관과 상의하여 실록청의 관원들을 선발하여 임명함으로써 실록청의 구성이 완료되었다. 이때 임명된 관원은 도청이 당상 3인, 낭청 4인이고, 1방, 2방, 3방이 각기 당상 4인, 낭청 5인으로 모두 34인으로 구성된다.

이상의 34인과 총재관을 포함한 35인 중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해서 근무한 사람은 도청당상 민점과 도청낭청 유명현 등 이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 중 일부는 질병 등의 이유로 다른 관원들로 교체되었고, 일부는 중간에 지방관으로 임명되거나 승지로 선발되면서 실록청을 떠나게 되었다. 특히 일부의 관원들은 아예 실제 작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도청당상으로 임명되었던 강백년은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탄핵을 받아 교체되었고, 도청당상 박세당과 일방당상 장선징, 삼방당상 김만중 등은 임명된 직후부터 칭병하며 출임에 응하지 않다가 결국 단 하루도 근무하지 않은 채 다른 관원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사초의 산절 작업을 담당했던 1방, 2방, 3방 등은 1675년 8월 12일에 산절 작업이 완료된 후에 해체되었고 담당 관원들도 직임을 면하게 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기간은 《실록청서계》에 정리되어 있으며, 도청의 작업 내용을 기록한 부분과 각방등록 및 등록청등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소속 관원들이 임명되고 교체된 날짜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실록청사목》의 제정



실록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임명한 휴 윤5월 3일에는 실록청 운영의 원칙을 규정한 《실록청사목》이 정해졌다.



(3) 보조인원과 물자의 징발



실록청의 관원들이 임명되고 《실록청사목》이 정해지면서 실록 편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록청은 먼저 《실록청사목》에 의거하여 각 관청에 문서를 보내어 필요한 서리와 사령들을 소집하고 필요한 물자의 제공을 요구하였다. 즉 윤5월 6일부터 12일까지의 사이에 호조와 병조, 형조, 한성부, 어장소 등에 실록청에서 일할 서리와 사령 및 수직군사, 다모 등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또 호조와 공조, 장흥각, 풍저창, 전설사, 사도사, 선공감, 제용감, 평시서, 교서관, 예빈사, 군자감, 친상감 등의 관청과 실록청에 딸린 별공작 등에 실록청에서 사용할 종이, 붓, 먹 등의 문방구와 자리와 방석, 서안, 그리고각종 그릇과 도구 그리고 옥편류들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물자 제공의 요구는 이후에도 필요한 물품이 생길 대마다 수시로 이어졌다.



(4) 사료의 수집과 시정기 산절 작업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편찬 작업에 필요한 기본 사료의 수집도 함께 진행하였다. 먼저 실록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사초 즉 시정기를 춘추관에서 실록청으로 옮겼다. 시정기는 윤5월 12일에 춘추관으로부터 실록청으로 옮겨졌는데, 이를 위해 실록청에서는 윤5월 9일에 미리 춘추관에 현종 재위 기간인 1659년(현종 즉위) 5월부터 1674년(현종 15) 8월까지의 시정기를 옮겨가겠다고 통지하고 옮기는 당일에 실록청의 당상이 직접 춘추관에 가서 옮겨왔다. 이에 앞서 실록청에서는 시정기를 보관할 궤짝을 마련하고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여 잘 수리하여 놓아야 했고 아울러 시정기를 옮기기 위한 가자와 수송군의 징발도 미리 해당 관청에 준비시켜 놓아야 했다. 또한, 시정기가 실록청으로 옮겨지 ㄴ날부터는 실록 편찬을 마치고 시정기를 춘추관에 돌려줄 때가지 이를 보호하기 위해 포도청의 군관이 군사들을 이끌고 실록청을 지켰고, 실록총의 낭청들도 매일 저녁 세 사람씩 교대로 돌아가며 숙직하여야 했다. 그런데 춘추관으로부터 시정기를 옮겨온 이후에 검토한 결과 현종 최말년인 1674년 1월 22일부터 8월까지의 부분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실록청에서는 국왕에게 건의하여 이 부분을 담당 사관인 이후함에게 정리하게 시켰다.

시정기와 함께 승정원의 일기가 승정원 주서청으로부터 실록청으로 옮겨졌고, 시강원이 소장하고 있던 1667년 이후의 조보도 옮겨졌다. 동시에 비번사의 장계축, 의금부의 추안, 승문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사대문자와 중국 황제가 보낸 조칙, 중국과의 교섭에 관련된 문서들, 관상감에서 보관하고 있는 재이 및 지방의 풍우, 지진 등에 관한 기록류, 문반과 무반의 인사와 과거에 관한 기록들, 호조의 전부와 균역 관련 문서, 선혜청과 각 창의 전부와 출역 관련 무서, 형조와 한성부의 옥송에 관련된 문서, 예조의 각종 의례, 헌장, 교린 등에 관한 문서, 어사들의 서계 등을 해당 관청에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 자료들은 시정기 및 승정원일기 등의 기본자료를 검토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검토가 끝난 후 곧바로 각 관청에 다시 반납되었다.

이처럼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그리고 각 관청의 문서자료들이 수집됨과 동시에 곧바로 실록 편찬을 위한 설제 작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이 첫 번째 단계는 시정기 산절 작업으로 실록청의 각방은 옮겨온 시정기를 월별로 나누어서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때부터 실록청 관원들의 업무가 바빠졌기 때문에 실록청 소속 관원들은 월과나 전경, 시재, 역서 등을 면제받게 되었다. 시정기 산절 작업은 시정기를 옮겨온 직후부터 시작해서 8월 12일까지 약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 중간에 7월 20일경에는 산절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므로 경비의 절감을 위해 전체 3방의 구성을 1방으로 축소하고 관원도 당상 4인과 낭청 5인 등 9인만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산절 작업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8월 12일에는 남은 1방도 완전히 해체하고 그 대신 찬수된 실록의 원고를 정서하는 등록청을 설치하였다.



(5) 찬수 작업



시정기의 산절 작업이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실록 찬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찬수 작업은 7월 20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날 실록청에서는 《실록청찬수범례》를 제정하여 실록에 어떠한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마련하였다.

찬수 작업은 도청의 당상과 낭청이 담당하였는데, 산절된 시정기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승정원일기와 각 관청의 관련 자료들을 대조하면서 중요한 사항들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찬수된 내용은 최종적으로 대제학이 검토하여 실록의 원고로 완성하였다. 당시의 대제학은 김양주로서 그는 당연직으로 도청 당상을 맡고 있었다.

찬수 작업이 시작되면서 찬수관들이 정리한 실록의 원고를 등서하는 등록청이 설치되게 되었다. 등록청은 시정기의 산절을 담당했던 1방이 해체된 8월 12일에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상은 없고 15명의 분판등록낭청을 임명하였다. 또한 서리 7명과 사령 7명, 고직 1명 등의 보조인원을 두었다. 하지만 등록청이 설치되고 나서 실제로 등서 작업이 시작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찬수의 업무를 맡고 있는 당상과 낭청들이 모두 다른 관청의 임무를 겸하고 있어서 찬수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들이 정리한 내용을 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야 하는 대제학 김양주가 병조판서로서의 업무에 바빠 원고를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2월 6일의 조강 때에 총재관 허적의 건의로 실록원고가 만들어질 때까지 등록낭청들의 실록청 출근이 면제되었다. 실제로 등서의 업무가 시작된 것은 1676년 정월 29일 이후로 생각되는데, 이때 실록청에서는 처음에 임명된 등록낭청 중의 대부분이 질병이나 지방관을 맡게 되어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관원들로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본 의궤 《분판등록청등록》 부분에 정리된 등록낭청들의 근무일수에 대한 기록에는 처음에 임명된 15명의 등록낭청 중 실제로 등서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이연만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실제 작업이 시작되기 이전에 교체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찬수 작업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된 데에는 대제학 김양주가 바빴던 것 이외에도 등록청 설치 장소의 이동과 현종의 행장찬집 작업과 같은 일들로 등록청 관원들이 찬수 작업 자체에 몰두하기 힘들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찬수 작업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등록청이 설치되어 있던 형조와 공조에 1674년(현종15) 2월에 승하했던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부묘도감이 설치되자, 그 동안 이곳에 있었던 실록청은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시 비어 있던 창덕궁의 비번사 건물로 옮기기로 하고 1675년 9월 3일에 이곳으로 옮겨갔지만 옮긴 지 두 달여 만인 11월 15일에 다시 경덕궁(=경희궁)으로 옮겨야 했다. 원래 창경궁으로 옮겨가 있던 비변사가 다시 창덕궁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사용하던 건물을 비워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경덕궁에서는 처음에 옛 비변사의 건물만을 사용하였지만 1676년 6월 1일부터는 장소의 협소를 이유로 경덕궁내의 승문원, 시강원, 병조 등의 건물까지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건물들은 등록낭청의 직숙 장소로 이용되었다.

한편 1676년 정월부터는 현종의 행장을 찬술하는 작업에 실록청 관원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실록 찬수 작업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궤》에는 1676년 1월 17일에 찬집청의 관원을 별도로 임명하지 말고 실록청의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업무를 겸하게 하자는 승문원의 계와 그에 대한 국왕의 윤허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이 찬집청이 정파되는 3월 5일까지 실록청의 관원들은 찬집청의 작업에 전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찬집청은 현종의 행장을 찬술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청으로, 찬집청에 실록청의 관원들이 참여한 것은 행장의 찬술을 위해서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수 작업은 이상과 같은 요인들 때문에 더디게 진행되어서 찬수 작업이 시작된 지 10개월이 지난 1676년 5월 16일까지 1659년 즉 현종 즉위년의 실록 원고밖에 찬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그 이전의 《인조실록》과 《효종실록》이 모두 전왕의 대상 이전에 찬수를 완료한 것과 비추어 크게 지체된 것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실록청의 당상들의 다른 업무를 모두 면제해 주고 오직 실록 찬수의 일에만 전념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고, 국왕 역시 실록의 찬수를 속히 마치라고 재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찬수 작업을 서두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시행된 것은 관원의 증원이었는데, 5월 25일에는 실록청에서 낭청 2인을 추가로 배치해 줄 것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았다. 여러 관청의 문서를 대조하기 위해 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 증원의 명분이었다. 그리고 12월 16일에는 다시 실록청의 당상을 1인 늘려 주는 것이 허락되었다. 실록청의 당상을 늘리는 문제는 이미 이전부터 논의되던 것으로, 실록청 당상 홍우원은 6월에 국왕에게 그러한 내용의 건의를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하여 총재관 허적이 반대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찬수 작업이 지체되면서 결국 허적도 당상을 늘리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실록청의 당상은 4인이 되었지만 이처럼 당상을 늘리는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즉, 1677년(숙종 3) 1월 27일 실록청에서는 당상으로 근무하다 교체된 김석주를 대신할 관원을 선발해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이 모인 회의에서 실록청의 당상은 3인으로 제한하도록 의견이 정해져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석주를 대신할 관원의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어 3월 12일에는 대제학 민점이 자신은 찬수된 원고를 다시 정리하느라 실제 찬수 업무에는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김석주를 대신할 당상이 필요하다고 요구하였다. 찬수의 진도에 대한 고려는 이번의 요구는 받아들여져 다시 당상이 4인이 되었다. 이 4인의 당상 체제는 실록찬수청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체제는 이전의 실록청과는 다른 현종실록찬수청의 인원 구성이었다.

관원의 증원과 함께 실록청 관원들이 실록 찬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업무들로부터 면제되는 조처도 시행되었다. 1676년(숙종 2) 8월 11일에는 실록청의 낭청이 경시관으로 임명되어 지방에 내려가게 되자 그 임명을 무효로 하는 조처가 있었고, 11월 13일에는 실록청에 소속된 홍문관 관원들은 조강에 참여가 면제되었다. 또 12월 16일에는 홍문관 소속 실록청 관원들의 홍문관 입직을 면제시키고, 이들이 과거의 시관으로 임명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록청 당상들의 경연관 직책도 면제시켜 주었다. 나아가 당상들의 경우에는 실록의 찬수가 끝날 때까지 일이 많은 자리에 임명되지 않도록 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실제로 실록청 당상은 아예 대사헌과 같은 직책에는 후보로 올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들과 함께 실록청 관원들의 성실한 근무도 강하게 요구되었다. 1676년 6월 홍우원은 상소에서 실록청 관원들 스스로 이른 새벽에 출근하여 저녁 늦게 퇴근하는 '묘사유파(卯仕酉罷)'를 시행하자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총재관 허적도 동의하였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질병 등을 이유로 실록청에 제대로 출근하지 않는 관원들이 적지 않았다. 실록청에서는 국왕에게 관원들이 성실하게 근무하도록 독려해 줄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요청하였고,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국왕 역시 수차에 걸쳐 독려를 명하고 대로는 찬수 업무에 소홀한 관원들을 추고하게 하였다. 특히 1677년 2월 5일에는 직접 비망기를 내려 실록의 찬수가 늦어짐을 질책하고 이후로는 커다란 질병이 아니면 실록청 관원들이 매일같이 실록청에 나와 찬수작업을 진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 2월 14일에는 별감을 보내 관원들의 근무 상황을 검토한 결과 진시까지도 아무도 나와 있지 않고 신시에는 이미 모두 퇴근하였다고 하면서 '묘사유파'의 원칙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크게 질책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질책과 함께 특별한 은사를 내려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1676년 12월 22일에는 표피 사모이엄(紗帽耳掩) 3부와 서피의 사모이엄 6부를 당상과 낭청들에게 하사하였고, 1677년 3월 10일에는 실록청에 특별히 술과 음식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실록 찬수를 서두르라는 국왕의 독려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조처들에 힘입어 1676년 6월까지 겨우 현종 즉위년의 기사만을 찬수했던 찬수 작업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어 그로부터 채 1년이 못 되는 1677년 5월 22일에 나머지 14년 8개월분의 찬수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총재관으로 실록청을 책임지고 있던 허적은 찬수와 완성을 눈앞에 둔 5월 9일에 건강을 이유로 그 직책을 물러남으로써 찬수의 완성을 책임지지 못하였다. 허적에 이어서 총재관으로 임명된 인물은 좌의정 권대운으로 그는 이후 실록청이 그 작업을 마치고 해체될 때까지 실록청의 총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6) 인출 작업



실록의 찬수가 완료됨과 동시에 그것을 인쇄하는 인출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인출 과정에서 실록의 원고를 최종적으로 교열해야 할 대제학 민점이 여러 차례 출사를 하지 않아 인출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실록의 인출은 먼저 대제학이 찬술한 원고를 검토하여 미진한 곳을 수정하여 등록낭청에게 넘기면 등록낭청이 그것을 분판에 쓰고, 그 분판에 의거하여 장인들이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대제학의 원고 검토가 이뤄지지 못하면 이후의 작업들이 진행되지 못하게 되는데, 권점이 6월과8월에 각기 장기간 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에 차질이 있었다. 6월에는 권점이 도목대정(都目大政)에 참여하느라 쉬었고 다시 도목대정이 끝난 이후 관례의 휴가를 사용하느라 장기간 실록청에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8월에는 민점의 아들 민종도가 아버지를 위해 서북지방의 기생을 불러 잔치를 연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게 되자 출사하지 않았다. 두 차례 모두 실록청의 인출 작업이 지체되지 않도록 민점을 패초할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고, 민점은 출사하여 임무를 보았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인출 작업은 5월 23일에 시작되어 9월 3일까지 100여 일 사이에 완료되었고, 며칠간의 최종 장황 작업을 거쳐 실록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최종 완성된 《현종실록》은 모두 22권의 분량이었으며 춘추관을 비롯한 5곳의 사고에 보관하기 위하여 5질 110권이 인출되었다. 인출 작업이 완료된 당일에는 등록낭청과 하인들을 멸거하고 공장들도 이후의 작업에 필요한 사람들만을 남겨 두게 되었다.

《이문질》의 1677년 10월 24일 교서관에 보낸 문서 내용에 의하면 실록의 인출에는 총 7만 6천 655개의 활자가 사용되었는데, 이중 3만 5천 830자는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빌린 것이고 나머지 4만 825자는 실록청에서 새로 주조한 것이었다. 민간에서 소장한 활자는 격동계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활자의 주조 작업은 실록의 찬수 작업이 시작된 때부터 함께 진행되었는데, 1675년 12월초에 실록청에서는 경기감사와 한성부에 각기 활자 주조를 위한 도관을 만들기 위한 백토와 포토를 납입하라고 요구하였고, 호조에는 활자의 재료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1676년 3월에는 활자를 담당하는 관리들을 시켜 필요한 활자의 수를 점검하게 한 후 본격적으로 활자의 주조를 시작하였다. 실록 인출을 위해 개인들로부터 빌린 활자는 실록의 인출이 끝난 이후 곧바로 돌려주지 않고 새로 주조한 활자와 함께 교서관에 내려서 새 책들을 찍게 하였다. 이는 인출 작업이 완료되기 직전인 1677년 8월 20일 조강에서의 실록청 낭청 유하익의 건의에 의한 것으로, 유하익은 활자가 나누어지면 하나의 책도 인쇄할 수 없지만 모아 놓으면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으므로 실록 인출이 끝난 후에도 활자들을 한군데에 모아 놓고 이 활자들로 우선 전후한서를 찍어 널리 나누어 주자고 하였다. 한편, 활자를 빌려준 개인들에게는 원래 댓가를 지급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사양하므로 대신에 새로 찍은 책들을 한 부씩 주기로 결정하였다.



(7) 실록의 봉안과 사초의 세초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봉안하게 되는데, 각지의 사고로 옮겨지기 전에 우선 춘추관의 실록각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실록의 완성이 보고된 이후 춘추관에서는 9월 9일을 실록을 봉안할 길일로 정하였고, 아닐 실록청의 관원들이 실록을 춘추관으로 봉안하였다. 실록을 봉안할 때에는 처음 춘추관에서 가져온 시정기와 실록의 초고인 초초, 중초 등의 사초도 함께 춘추관으로 옮겼다. 실록과 사초는 붉은 보자기로 덮고 붉은 실로 묶어서 채련에 실어서 춘추관으로 운반되었으며, 충찬위 10명과 말을 탄 인로군 4쌍, 담지군 50명이 동원되었다. 한편, 같은 날 실록청에서는 전왕의 행장과 지문, 애책 등을 수록하고 있는 실록의 부록을 한 부 더 인출하여 국왕에게 진상하였다. 실록은 원칙적으로 국왕이 직접 볼 수 없도록 하였지만 부록만은 한 부를 더 인출하여 국왕에게 진상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때에는 붉은 명주 보자기에 싸서 붉은 함에 넣어서 진상하였다.

실록이 완성됨과 동시에 편찬에 이용되었던 자료들도 정리되었다. 실록의 편찬에 참조하기 위해 실록청으로 가져갔던 자료들 중 마지막까지 이용된 승정원일기가 승정원으로 반환되었고,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된 시정기와 이를 정리한 초초, 중초는 세초를 하게 되었다. 시정기와 중초 등의 사초는 우선 완성된 실록과 함께 춘추관으로 옮겨져 임시로 보관되었다가 9월 19일에 창의문 밖의 차일암에서 세초되었다. 세초는 사초를 잘게 자른 후에 물에 넣어서 먹의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서 춘추관에서 잘게 잘라 빈 가마니에 넣어서 차일암으로 옮겨 물에 담그었다. 세초된 종이는 호조에서 체지로서 수납하였다.

세초와 함께 실록의 찬수에 노력한 공로를 치하하는 선온 의식이 거행되었다. 선온은 9월 16일과 9월 19일 각기 의정부와 차일암에서 거행되었다. 애초에는 선온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잔치를 베푸는 사악과 사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흉년이므로 행사를 줄이자는 총재관 권대운의 요청에 의해 선온만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선온의식에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였거나 질병중인 사람을 제외한 실록청의 전현직 관원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9월 20일에는 총재관을 비롯한 실록청 관원들이 모두 대궐에 나아가 선온에 대한 감사의 글을 올렸다. 한편, 선온에 앞서 9월 13일에는 국왕이 비망기를 내려 전현직의 실록청 관원과 역원들에게 대한 포상을 하였다. 전현직의 총재관에게는 각기 안장을 갖춘 말 1필, 기타 당상과 낭청들에게는 각기 숙마, 반숙마, 아마, 마장, 상현궁, 부장궁 중의 한 가지를 내려주었는데, 근무 기간에 따라 포상의 차이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조 역할을 했던 역원과 하인들에게는 미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8) 의궤의 작성



실록의 편찬이 완성되면서 곧바로 의궤의 작성이 시작되었다. 9월 9일에 실록청의 계에 의거하여 실록청의 낭청 4인으로 하여금 의궤 편찬을 담당하게 하고 《의궤사목》을 정하였다.

《의궤》의 《이문질》에 수록된 1677년 9월 18일의 문서에 실록의궤청에 소속된 역원의 삭료를 9월 10일 기점으로 계산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날부터 의궤의 제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의궤가 완성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백산본과 오대산본에는 수록된 내용에 차이가 있으며 두 책은 작성된 시점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 태백산본의 경우 《이문질》의 마지막 항목에 1677년(숙종 30) 10월 11일을 기점으로 해서 의궤를 만드는 데 참여한 서사 3인과 고직 1명에게 1달의 과미를 지급하라는 호조에게 보낸 문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1월초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677년(숙종 3) 9월까지의 사항만을 기록하고 있는 오대산본은 그보다 먼저 완성되었을 수 있다. 의궤의 편찬으로 실록의 편찬 과정은 모두 완료되었다.



(9)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의 편찬 및 인출에 동원된 보조인원과 물자



실록의 편찬 작업은 실록청의 관원들이 담당하였지만 이들의 작업을 돕기 위해 사서와 서사, 사령, 고직, 수직군사, 다모와 같은 보조인원들이 동원되었고, 별공작에도 감역과 장인, 고직 등이 배치되었다. 실록청의 도청과 각방, 등록청, 별공작 등에 소속되어 일한 보조인원의 명단은 《의궤》의 해당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도청에는 서사 10인, 고직 1명, 사령 12명, 다모 2명, 수직군사 12명, 보도군 2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각방에는 서사 4인(1방에만 3인), 고직 1명, 사령 4명, 다모 2명, 수직군사 4명씩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등록청에는 서사 9인, 고직 7명, 다모 2명, 수직군사 6명, 보도군사 1명이, 별공작에는 사원, 고직, 수수, 소목장, 야장, 칠장 등이 한 명씩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실록의 인출 과정에도 다수의 관원과 장인들이 참여하였는데, 의궤에 수록된 이들의 명단에는 보좌관 1명, 분지창준 2인, 교정창준 13인, 상판제원 5인, 수장제원 11인, 균자장 16명, 인출장 4명, 장책제원 3인, 시장 1명, 소로장 2명, 칠장 1명, 각자장2명, 조자장 1명, 야장 1명, 소목장 2명, 목수 1명, 쇄약장 1명, 주장 6명, 동철장 2명, 납장 1명, 천혈장 1명, 박배장 1명, 다회장 2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장인들에게는 인출이 한창이던 1677(숙종 3) 8월 11일에 추석을 맞이하여 총재관의 지시에 따라 미와 포가 특별히 지급되기도 하였다.

실록의 편찬 작업에는 또한 많은 물자들이 이용되었다. 《의궤》의 《감결질》과 각방의 등록에는 각 시기별로 실록청에서 각 관청에 요구한 물자들의 항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붓과 먹, 종이, 옥편류와 같은 직접 편찬 작업에 이용되는 물품뿐 아니라 관원들이 사용하는 서안과 돗자리, 방석, 병풍, 우산, 화로, 숫돌, 요강과 같은 물건과 역원들이 깔개로 사용하는 빈 가미니, 다모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그릇류와 물통, 표주박, 그리고 난방용 땔나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였다. 한편 《별공작등록》에는 별공작에서 제작한 물품의 항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편찬 작업 및 인출 작업에 필요한 장비와 도구류들이었다.

인출 작업에 소요도니 도구와 물자는 《의궤》의 《인출제원》에 항목별로 나누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책을 찍어내는 작업과 제본 작업 등으로 나누어 소요된 도구와 물자의 양과 장인을 도와 작업에 참여한 조역의 숫자를 기록하고, 다시 실록 1책의 겉표지를 만드는 데 들어간 종이와 물자, 실록을 넣어 둘 궤짝을 제작하고 장식하는 데 들어간 목재와 물자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인출 작업에 실제로 투입된 물자의 양을 종류별로 나열한 《실입》의 항목을 두고 있다.

물품들은 주로 호조와 제용감을 비롯한 중앙의 관청과 한성부에서 조달되었지만 특별히 초주지와 황양목, 가판, 전칠, 해칠 등은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등의 지방감영에 조달을 의뢰하였다. 이중 강원도에서 상납한 가판의 규격이 원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여 규격을 맞출 것이 거듭 요구되기도 했고 경상도에서 상납하기로 한 초주지는 예정된 기일을 넘겨 기일을 맞출 것이 독촉되기도 했다. 한편 중앙과 지방으로부터 공급받은 물건 중 편찬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사용하고 남은 물건들은 1677(숙종 3) 10월 1일에 호조로 이관되었다.

숙종 6년(1680)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顯宗實錄)》의 내용을 문제삼아 개수 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해 7월 10일에 판교(判校) 정면이 상소하여 개수를 건의하였고, 15일에 숙종과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민정중(閔鼎重)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 등이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들은 춘추관으로 하여금 《현종실록(顯宗實錄)》의 문제점들을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27일 춘추관 당상의 인견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조사의 결과가 주달되었는데, 그 요점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1. 대단히 긴요한 일 가운데 빠지거나 잘못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2. 실록 찬술에는 일정함 범례가 있게 마련인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만을 의지하여 초솔(草率)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혹 앞뒤가 뒤바뀌거나 한 가지 일이 거듭 나와 요령이 없다.

3. 인출 때 교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오자(誤字)가 많으므로 후세에 전하여 고신(考信)의 책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4. 시헌력(時憲曆), 대통력(大統曆)의 호용(互用)이나 역법(曆法)의 논의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5.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된 것은 하찮은 대화까지도 모두 옮겨 기록하였고 제대로 문장이 되지 못한 것까지 기록하였다.

6. 내용이 소략하고 기사의 전후 맥락이 통관(通寬)되어 있지 않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부정적 논의를 근거로 개수를 결정하고 실록개수청을 설치하여 같은 달 29일에 김수항(金壽恒)을 총재관으로 임명하고 도청 당상 및 도청 낭청을 차출하여 개수에 착수하였다. 실록청은 대개 도청과 1, 2, 3방(房)으로 조직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현종 때의 시정기가 세초(洗草)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1, 2, 3방을 설치하지 않고 도청 당상과 도청 낭청 및 등록 낭청만을 임명하여 개수하였다.

그후 10월 26일에 왕비 김씨[仁敬王后]가 승하하여 당분간 실록 개수청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공조참판 이단하(李端夏)의 주장으로 계속 편찬하게 되었다. 숙종 8년 7월 3일에 인출을 시작하여, 9년 3월에 간행을 마치고 행장, 애책문, 시책문, 숭릉지 각 1건을 부록으로 붙였다.

실록개수청의 찬수관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 김수항(金壽恒)

도청 당상: 이단하(李端夏), 신정(申晸), 이민서(李敏敍), 이익상(李翊相), 김만중(金萬重), 이선(李選)

도청 낭청: 신완(申琓), 심수량(沈壽亮), 김진귀(金鎭龜), 심유(沈濡), 이세백(李世白), 이돈(李墩), 신필(申畢), 박태보(朴泰輔), 권두기(權斗紀), 이사영(李思永), 임영(林泳), 이여, 박태손(朴泰遜), 오도일(吳道一), 서종태(徐宗泰)

등록 낭청: 윤세기(尹世起), 이굉(李宏), 한구(韓構), 김구(金構), 윤덕준(尹德駿), 조형기(趙亨期), 김호(金灝), 유득일(兪得一), 이선부(李善溥), 강석규(姜錫圭), 권항(權恒), 김석(金晳), 이동욱(李東郁), 이율, 이언강(李彦綱), 유명일(兪命一), 김만길(金萬吉), 권지(權持), 정제선(鄭濟先), 고익형(高益亨), 정상박(鄭尙樸), 윤홍리, 이직, 임환(林渙), 양중하(梁重厦), 심평(沈枰), 황흠(黃欽), 조석주(趙錫胄), 정추(鄭推), 신명원(申命元), 김시휘(金始徽), 신계화(申啓華), 박세준, 이삼석(李三碩), 최석항(崔錫恒), 최규서(崔奎瑞), 윤지익(尹之翊), 서종헌(徐宗憲), 이이명, 김우항(金宇杭), 양성규(梁聖揆), 김홍정(金弘楨), 유명웅(兪命雄), 김홍복(金弘福), 이덕성(李德成), 박태유(朴泰維), 김일성(金日省), 홍수헌, 심권(沈權), 윤세희(尹世喜), 이두악(李斗岳), 이정겸(李廷謙), 김덕기(金德基)



7.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의 내용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편찬의 체제나 기본적인 사실의 서술에 있어서 원본인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남인과 서인의 당론(黨論)에 관련된 내용이나 인물 비평 혹은 사론(史論)에서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사의 내용에도 수정 보완된 것이 적지 않다. 그것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인견 때의 설화나 의례(儀禮) 관계 기사의 서술은 개수 실록이 현저히 자세하게 다루었다.

2. 현종에 관계된 기사도 개수 실록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는데, 현종의 조처에서 누락되었던 기사를 첨가한 것이 다수이다.

3. 사신왈(史臣曰)이나 기타의 인물평에 있어서는 두 실록이 서인과 남인에게 각자 유리하게 서술되었고, 기사의 삭제와 첨가도 그에 따랐다.

4. 김석주나 기타 척신 계열의 인물에 대한 기사는 개수 실록에서 훨씬 많이 다루고 있다.

5. 당론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거나 초연했던 인물들에 대한 기사는 대체로 내용이 동일하다.

6. 백성들의 강상(綱常)과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거나 개수실록에서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는 서인의 당론이 반영되어 있지만, 《현종실록(顯宗實錄)》을 보완하려고 한 것인만큼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충실도를 높이고 내용을 풍부히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원래의 《현종실록(顯宗實錄)》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 보존한 것도 고마운 일이다. 이로써 현종 대의 사실(史實)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두 실록을 함께 읽고 비교 검토하여 역사인식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