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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 (奎12742)
 1. 《영조실록(英祖實錄)》의 편찬 경위



《영조실록(英祖實錄)》은 조선 제21대 국왕이었던 영조(英祖)의 재위 기간(1724∼1776) 5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로서, 모두 1백 27권으로 간행되었다. 본래의 명칭은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실록(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實錄》 약칭 《영종대왕실록(英宗大王實錄)》이었다. 그러나 고종(高宗) 26년(1889)에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추존 개정(追尊改定)한 후에는 《영조실록(英祖實錄)》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영조 즉위년 9월 정족산사고에 행봉교 윤상백을 파견하여 고출하였으니 이때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당시의 실록에는 지관사 김일경이 정족산사고에서 《仁宗實錄》과 《明宗實錄》을 상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출시에는 당상 1명과 한림 1명을 파견하는데 두 기록에 부분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당상은 김일경, 한림은 윤상백이 파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왕위계승을 종묘, 사직과 경종의 사당인 영휘전(永徽殿)에 고하는 축문에서의 칭호문제로 고출하였다. 영조는 선왕인 경종과 부자간이 아니고 형제간이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된 것 같다. 결국 혼전(魂殿)과 영휘전(永徽殿)의 축문은 '애사(哀嗣)'와 '사왕(嗣王)'으로 적고 3년 후는 '효사(孝嗣)'와 '사왕(嗣王)'으로 적기로 하였다.

영조 3년 1월 《宣祖實錄》을 상고하여 인조가 탄강한 옛터의 비문을 고쳐지었다. 이보다 앞선 이관명이 인조가 탄강한 옛터의 비문을 고쳐지었는데 그 비문에 선조가 27년에 해주에서 주필할 때의 일을 기록했는데 월일이 틀렸었다. 이대에 이르러 이관명이 차자를 올려 실록을 상고하기를 청해 고치게 된 것이다. 이때 정족산사고에 파견된 행예문관대제학 이[ ]와 행봉교 이[ ]가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영조 4년 11월 왕세자가 10세에 사망하였다. 왕세자의 상을 당해 백관의 복제는 제쇠삼월(齊衰三月)로 마련하라고 명했다. 이에 최복을 마련해야 할 지를 왕에게 물으니 실록에서 상고한 내용에 최복입는 일이 명백히 실려있으니 대신과 유신에게 물어서 정하라고 명했다.

영조 5년 5월 《肅宗實錄》을 적상산사고에 봉안하고서 고출도 하였다. 이때 행봉교 박필균이 작성한 실록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실록에서 시강원의 존파(存罷)에 대해 조사해보니 명종년간 순양세자(順懹世子)가 사망했을 때는 춘방(春坊)의 존파에 대해 드러난 곳이 없었고 3년안의 정목에도 춘방의 인원을 차출한 일이 없었다. 이에 왕은 1년이 지난 뒤에 춘방을 혁파하라고 명하고, 이 뒤로는 실관은 차출하되 겸관은 궐원이 나도 보임하지 말게 하였다.

9월 《國朝寶鑑》의 계속 편찬에 관해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게 하고 실록도 고출한 다음 학식있는 사람들과 각별히 가리어 거행할 것을 명했다.

영조 6년 6얼에 행수찬 조명택이 작성한 적상산사고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그러나 고출한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또한 영조 7년 4월에 동지사 박문수와 행봉교 홍창한이 작성한 정족산실록 고출형지안도 전래되고 있다. 역시 고출한 목적을 알지 못했다.

영조 10년 11얼 왕은 원자가 탄생하면서 효장세자빈 조씨를 그대로 빈궁이라고 칭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여겼다. 빈궁에도 생시에 칭호가 있는 전레가 명백한데 지금 빈궁에게 칭호가 없으니 예관에게 널리 상고하라 명하였다. 실록을 상고한 바 국초에 세자빈을 책봉할 때 정안왕후는 덕빈을 봉했고, 원경왕후는 정빈을, 소혜왕후는 경빈을 봉했는데 현덕왕후는 작호가 없었다. 이후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한 글자의 가호(加號)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작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별겸춘추를 보내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고 유신에게 《皇明會典》과 《文獻通考》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11년 2월 행예문관대제학 윤정과 별겸춘추 송교명이 강화 정족산사고에 가서 실록을 상고한 바 이때의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실록을 고출한 후 시임대신, 원임대신, 양관, 정부, 육조참판 이상을 불러 의논하게 한 후 ‘생유일자호사이이자시(生有一字號死以二字諡)’가 국전이므로 효경세자빈 조씨를 현빈으로 삼았다. 또 도감을 설치해 옞와 공조의 판서와 낭청으로 하여금 옥인(玉印)을 만들어 올리게 한 후 내전에서 선사하였다. 그러나 교명과 죽책문은 없었다.

영조 12년 8월 대신들이 한더위와 한추위에는 경연을 정지할 것을 품계하자 왕은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기사관 이성중이 포쇄하면서 이를 고출하였다. 명종년간에는 대신들이 옥체가 손상된다고 정강할 것을 청했으나 옥당에서는 폐지시켜서는 안된다고 아뢴 바가 있었다. 선조년간에도 여름과 겨울에 잇달아 경연을 설행하다가 만년에는 정지했지만, 인조년간에는 가끔 설행하다가14년 6월에야 탈품(脫品)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한추위와 한더위라고 어떻게 시사의 정지를 품계할 수 있겠는가? 뒷날 태만한 사람이 이를 핑계삼아 일을 폐지하지 않겠는가고 걱정하였다.

영조 15년 3월에는 왕이 친경할 때의 의식을 실록과 《親耕謄錄》에서 고출하였다. 이때 정족산사고에 파견된 예조참판 박사정과 절겸춘추 이성중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영조 16년 6월 좌의정 김재로가태묘의 축식에 대해 아뢰었다. 종묘 전전(前殿) 각실의 대왕과 왕후의 축식과 사대친묘(四代親廟)에는 세대에 따라서 바꾸어 쓴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효질(孝姪)이라고 칭하는 세대는 ‘황백고고(皇柏高考)’ 또는 ‘황백조비(皇柏祖妣)’라고 써야 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예종 때에 쓴 문종실의 축식과 선조년간에 쓴 인종실의 축식에는 반드시 초년에 강정하여 이미 행한 전례가 있을 것이므로 앞으로 사관이 포쇄하러 갈 때 실록을 상고하여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왕은 윤허하였다.

영조 17년 10월 정족산사고의 형지안에는 행홍문관부수찬 이종적이 고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출한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영조 18년 6월 도승지 이익정이 단경왕후가 가례를 올린 해를 실록에서 상고하란 명을 받았으나, 실린 기록이 없어 《璿源譜略》에 첨입하지 못하였음과 종묘령 신구종이 보여준 《溫陵誌》에 연산군 5년에 가례를 올린 명확한 기록이 있음을 보고하였다. 《溫陵誌》는 신구종의 아들 신후담이 편집한 것이다. 가례를 연산군 5년 기미년에 행하였는데 추복도 200년 후 기미년에 있었다고 하면서, 가례와 복릉의 사실을 《璿源譜略》과 지장에 입록할 것을 청하자 종박시(宗薄寺)와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아울러 거행하게 하였다.

또한 왕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임진왜란에 변을 당했을 때의 사적을 연신(筵臣)에게 물었으나 상세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8우러 예조에는 《改封陵儀軌》를 찾아서 들이니 왕이 선대의 화변(禍變)을 비로소 상세히 알았으니 이는 내가 불초한 탓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우리나라 사람들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일만 깊은 원수로 여기고 있으나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일은 이것이라고 하였다.

영조 19년 3월 여러 대신들이 빈청에 모여 장차 국왕의 50세 기념을 위한 진연을 왕대비인 숙종 제2계비 인원왕후께 계청하고자 하였다. 이에 왕은 자전(慈殿)의 사복(私服)의 월한(月限)이 차지 않았으니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학례(視學禮), 친경례(親耕禮), 양로연(養老宴), 대사례(大射禮)는 거행하고자 하였다. 양로연은 열조에서 채 행하지 못한 것이지만 대사례는 중종년간에 이미 행한 전례이므로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정족산사고의 실록을 고출한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는데, 이조참판 이익정과 행검열 조운규가 파견되었다. 이어 대사례를 거행하고 사유의 장관을 사원으로 입참하게 하였다. 사례가 끝난 후에는 명륜당에서 시사(試士)하기도 하였다. 시관으로 낙점받은 자 외에 문무관원과 종친 20명을 정하여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고 장악원에 명해 어시 때 연주하는 악장을 익히게 하였다. 뒤에 《中宗實錄》을 상고한 바 사원이 60여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다시 문무관원, 종친, 의빈 중에서 각각 10명을 더하게 하였다.

8월 왕이 정릉(貞陵)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작헌례 후 참봉 유성제에게 혜신옹주의 묘를 물었다. 혜신옹주는 《璿源譜略》에도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봉릉(封陵)할 때의 의궤와 사가의 문자를 상고하여 앞으로 실록을 포쇄할 때 상고할 것을 명했다.

영조 20년 9월에는 형조판서 서종옥과 행검열 남태회가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고출한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고출목적은 알 수 없었다.

영조 21년 8월 지평 정권이 상소하기를 종묘의 축식은 ‘효회손사왕신(孝會孫嗣王臣)’이라고 하는데, 정종, 문종, 단종, 예종의 축문에는 다만 ‘사왕신(嗣王臣)’이라 되어 있고, 인종의 축문에는 ‘국왕(國王)’이라 적혀 있고 ‘효회손(孝會孫)’이 없으며, 명종은 ‘효회손사왕신(孝會孫嗣王臣)’이라 되어 있다고 하였다. 비록 방존(旁尊)일지라도 ‘효회손(孝會孫)’이라 해야하는데 인종실의 ‘국(國)’자는 빨리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춘추관에 명해 실록을 상고하게 하는 홍문관에는 예서를 널리 참고하게 하여 예의에 합치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영조 23년 2월 왕대비에게 회갑을 기념해서 강성(康聖)의 존호를 가상하였다. 이때 왕이 늙은이를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도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니 선조(先祖)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따를 것을 명하였다. 아울러 실록을 상고해내어 조신 4품 이상으로 70세 된 이와 서서인으로 80세 된 이에게 가자하도록 하고 대신과 자궁(資窮)인 이에게 음식물을 가지고 찾아가서 안부를 묻도록 하였다.

6월 춘추관 당상에게 명해 인조반정 때의 실록을 상고하고 등서하여 일기청에 보내어 정리하게 하였는데 입시한 한림이 불가하다고 여러 번 간했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12월에는 유생들이 문종비에 대한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세종, 문종, 단종 삼대 실록의 상고를 명하였다. 문종비에 대해 권씨, 최씨 등 여러 기록이 있는데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측 기록과 우리나라측 기록이 일치하지 않고 조야에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문종이 세자였을 때 단종을 낳다가 24세로 사망한 세자빈 권씨를 문종 1년에 현덕왕후로 추증한 것은 알고 있었다. 이에 지춘추 김시형과 행검열 심관을 정족산사고에 보내면서 상세히 조사할 것과 실록을 상고하여 아뢰기 전에는 의관을 벗지 않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실록에는 문종비로는 현덕왕후가 빈궁에 있다가 승하한 뒤 책빈(冊嬪)한 기록은 없었다.

영조 24년 1월 도감당상에게 의조(儀曹)에 전거할 만한 문헌이 없으므로 영희전(永禧殿) 제1실, 제2실, 제3실을 봉안할 때의 절목에 대해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했다.

영조 26년 9월 원손의 보양관(輔養官)에 대해 강화에 있는 《世宗實錄》을 상고하도록 명했다. 이는 세조년간 성삼문이 신숙주에게 한 말 ‘너는 집현전(集賢殿) 달밤에 임금께서 원손을 안으신 채 하교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란 말과 세자빈 권씨 즉 현덕왕후가 원손으로 하여금 칙서를 맞이하게 할 때 익선(翊善)과 찬독(贊讀)의 이름이 있었으나 인원수를 알 수 없으니 실록을 상고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 원손의 보양관(輔養官)도 마땅히 등급의 구분이 있어야 하니 정종 2품 당상이나 3품 중에서 융통하여 차출하게 하였다. 이에 행용양위부사직 홍봉한과 행검열 박정원이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작성한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11월에 원손을 교도하는 사부가 중요한데 양조의 실록에 사부차출을 청한 기록은 있으나 품계를 알 수 없었으므로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뭍도록 하였다. 이 원손은 영조 28년 3월초에 사망하였으니 의소세자이다.

영조 29년 2월 강릉왕후의 장월(葬月)에 관한 기록이 실록과 《譜略》의 기사와 서로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건청에 분부하여 비문에 ‘모년하(某年夏)’라고만 쓰라고 명하였다. 이때 호조판서 조영국과 행검열 이명식이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고출한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영조 31년 1월 행예조판서 이익정과 검열 이항조가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고출한 형지안이 전래된다. 역시 고출목적을 알아낼 수 없었다.

영조 32년 10월 원손(후의 正祖) 보양관(輔養官)을 선발하고 왕손교부(王孫敎傅)를 의정하라 명하였다. 세자와 왕자의 아들은 사체가 다르기 때문에 실록을 상고하여제도를 정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런데 세자의 중자(衆子)와 적서(嫡庶)의 사부에게 부여하는 품계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나 연한은 실려있지 않았다. 그러나 대군과 왕자에 비교하면 의당 차등이 있어야 하고 여느 종친과도 혼동시킬 수 없는 것이나 증거가 없었으므로 춘추관에 명해 실록을 상세히 살피게 한 것이다. 이때 정족산사고에 이조판서 정휘랑과 행검열 이담을 파견하여 고출한 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영조 33년 3월말에는 숙종 제2계비 인원왕후가 승하했고, 4월 왕이 예방승지 구규명을 불러 그 의절을 하교했다. 명릉(明陵)에는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안장되어 있었는데 숙종릉(肅宗陵)의 우편에 제2계비 인원왕후 김시를 안장할 것을 정하였다. 그런데 인산(因山) 때에 대여(大輿)를 따르면서 명릉(明陵)에 망배(望拜)하는 예가 있어야 마땅한데 대신이 모두 복색을 가지고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고 있었다. 경종 1년에 대가를 따라 봉심할 때 최복을 입은 채 한 산등성이에 함께 모신 능묘에 봉심한 전례가 있었다. 이 경우 근거할 전례로 인조 10년 6월 인목왕후의 국휼, 영조 6년 6월의 선의왕후의 국휼을 실록에서 상고하게 했다. 이에 실록을 상고한 바를 아뢰자 홍살문 밖에서 망배하는 것은 인정과 예절상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영조 34년 2월 홍계희가 열성의 지장을 교정할 때 고거할 일이 많다고 실록을 열람하기를 청한 바 있었는데 지춘추 이성중이 약원제거(藥院提擧)의 직무를 띄고 있어 멀리나갈 수 없게 되자 홍계희를 대신 보내도록 하였다. 이로서 행용양위부사직 홍계희와 행용양위부사과 윤동량이 정족산사고에 파견되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상고해온 실록을 토대로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불러 쓰게 하였다.

12월에는 인조 15년 만수성절(萬壽聖節) 때에 망궐례(望闕禮)를 어원(御苑)에서 행했는지 법정(法庭)에서 행했는지를 실록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이에 한림이 보고하기를 황명(皇明)을 위해서 올린 망궐례(望闕禮)는 인조 16년 정월 초하루에 궁정에서 자리를 서쪽으로 중원을 향해 곡배(哭拜)하였고, 인조 17년에는 명정전(明政殿) 전정(殿庭)에서 행했다고 하였다.

영조 35년 6월 이조판서 민백상과 행검열 김보정이 작성한 정족산사고 고출형지안이 전래되고 있다. 영조 37년 3월 행봉교 김몽화가 작성한 태백산사고 고출형지안도 진래되고 있으며, 영조 38년 윤5월 행대사성 서명신과 행봉교 이장로가 작성한 정족산사고 고출형지안도 전래되고 있다. 세 경우 모두 고출한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영조 38년 11월 강화에서 실록을 고출해온 홍악성이 입시하여 태조가 7순이 되던 태종 4년에는 헌수(獻壽)하고 죄수를 사면하고 옷감을 올리는 절차가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판결사 홍악성과 행봉교 홍검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있다.

영조 40년 8월 행봉교 조윤이 강화에 가서 사각의 수개와 아울러 《家禮》등의 서책을 봉안하였고, 아울러 《毅宗皇帝實錄》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인 숭정황제(崇禎皇帝)의 詔勅과 제명(制命)을 고출하였다. 이때 명에는 고황제(高皇帝)로부터 희종(熙宗)R지 15대 실록이 모두 명산에 장치되어 있었으나 의종(毅宗)만은 실록이 없었으므로 《毅宗實錄》을 편찬할 자료를 조선에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형지안에는 실록각 수개 및 포쇄형지안이라 기록되어 있고 고출한 언급이 없다.

영조 41년 9월 왕은 춘추관 당상과 낭관에게 강화의 사각에 가서 태종 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환도한 월일을 상고하라 명하였다. 이때 한성부좌윤 서명신과 검열 홍빈이 파견되어 고출하고 형지안을 작성하였다. 강화에서 돌아온 한림이 성조복도한성(聖祖復都漢城) 후의 성적(盛蹟)을 고출하여 복명한 바 환도한 것은 10월 8일이었다. 임금이 별단을 보고서 한양으로 도로 도읍을 옮긴 후의 성적이 지금과 부합되는 것이 많으니 기이하다고 하면서 등서해온 것을 사각에 간직하라 명했다. 이어 국초에 사민을 구휼하는 성거(盛擧)가 있었고 효종이 세자가 된 것도 인조 23년 을유년이었다면서 성덕을 본받아 내일 어의동(於義洞)의 옛 궁에 가서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쌀과 비단을 하사할 것이라고 명해 노인들을 모아 기다리게 하였다.

영조 43년 1월에는 예조에 날짜를 가려 친경과 친잠을 거행할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왕은 내전에 친잠을 명하고 74세에 충자(沖子)와 함께 친경을 하고자 하면서 이런 일이어쩌 나라의 사첩에 있었겠는가 라며 강화에 가서 실록에서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의 의례에 대한 기사를 고출할 것을 명했다. 공조참의 조엄과 행봉교 강분복이 정족산에 파견되어 고출하였다. 이때 고출해온 것이 규장각도서 중 《실록고출친누의(實錄考出親蠶衣)》인 것 같다. 그러나 친경에 관한 실록등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어 동춘추 조엄이 실록을 상고한 뒤에 복명한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2얼 춘추관에 명해 태종 7년의 실록을 찾아오라고 명하자 예조판서 한광회와 행검열 유강을 파견하였는 바 이때 작성된 형지안도 있다. 이들이 복명하니 행검열 유강에게 실록을 읽어 아뢰라고 하였다. 읽는 내용 가운데 당시 상황과 우연하게도 일치되는 일들이 많았다. 유강이 읽은 실록은 실록 자체라기 보다는 실록등초로 추정된다.

영조 45년 11월 왕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138년 이전 임신년 즉 인조 10년 인목왕후의 일을 생각하고 ‘추억임신육월이십팔일입석간문내(追憶壬申六月二十八日立石干門內)’를 써서 무덕문(武德門) 안에 세우게 하였다. 이틀 후 무덕문(武德門)에 세운 비석을 보고 실록에서 상고해낸 당상, 낭관 등에게 차등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영조 46년 4월 왕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추감황은편(追感皇恩編)을 기영(祇迎)하였다. 이때 왕은 국조에 일식과 월식에 대하여 상고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춘추관에 명해 정족산 사고의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당시 예조판서 서명응과 행검열 오정원이 작성한 고출형지안이 있다.

《영조실록(英祖實錄)》은 영조가 죽은 2년 뒤인 1778년(정조 2) 2월에 영종실록청(英宗實錄廳)이 설치되고 편찬이 시작되었다. 그 후 3년 6개월 만인 1781년 7월에 완성 간행되어, 사고(史庫)에 봉안되었다. 편찬에 참여한 전후 실록청 총재관(摠裁官)과 도청당상(都廳堂上)•각방당상(各房堂上), 그리고 도청•각방•등록(謄錄)•분판(粉板) 낭청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 김상철(金尙喆)•서명선(徐命善)•이은(李莩)•이휘지(李徽之)•정존겸(鄭存謙)

도청 당상: 이휘지•서명응(徐命膺)•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채제공(蔡濟恭)•조준(趙埈)•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이성원(李性源)•이명식(李命植)•이연상(李衍祥)•정일상(鄭一祥)•김익(金崩)•김노진(金魯鎭)•김이소(金履素)•서유령(徐有寧)•윤시동(尹蓍東)이다.

각방당상: 정민시(鄭民始)•홍낙명(洪樂命)•서호수(徐浩修)•오재순(吳載純)•정광한(鄭光漢)•이재간(李在簡)•정창성(鄭昌聖)•조시준(趙時俊)•홍낙성(洪樂性)•권도(權款)•정호인(鄭好仁)•이재협(李在協)•서유경(徐有慶)•이의익(李義翊)•이치중(李致中)•이경양(李敬養)•오재소(吳載紹)•이병모(李秉模)•김화진(金華鎭)•정상순(鄭尙淳)•김하재(金夏材)•이진형(李鎭衡)•채홍리(蔡弘履)•심염조(沈念祖)•정지검(鄭志儉)•홍양호(洪良浩)•홍검(洪檢)

도청 낭청: 박종래(朴宗來) 등 19인

각방 낭청: 윤행수(尹行修) 등 58인

등록 낭청: 오태현(吳泰賢) 등 37인

분판 낭청: 정익조(鄭益祚) 등 30인



2. 《영조실록(英祖實錄)》의 내용



《영조실록(英祖實錄)》은 조선시대 최장수 국왕이었던 영조 대 51년 8개월간의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이 시기는 탕평책(蕩平策)의 실시로 왕권이 안정되고 균역법 등 새로운 제도가 실시된 때였다. 또한 국방에 충실을 기하고,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문예가 활기를 띤 조선 왕조의 중흥기였다. 그러나 영조의 초기에는 무신란(戊申亂: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중기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하는 등, 정치적 격랑을 겪기도 하였다.

영조의 휘(諱)는 금(昑), 자(字)는 광숙(光叔)으로, 숙종(肅宗)의 둘째 아들이고 경종(景宗)의 이모제(異母弟)로서, 생모는 숙빈(淑嬪) 최씨(崔氏)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책봉되고, 경종 원년(1721)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가, 4년(1724) 8월 25일 경종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52년간 많은 치적을 남기고 1776년 3월 5일 승하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임옥사의 참상을 본 영조는 왕위에 오른 직후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그 타파를 천명하였다. 그래서 소론인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으로 영의정•좌의정을 삼고, 세제 책봉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신임옥사 때 자신을 모해하여 죄인으로 몰고 간 김일경 등 소론과격파와 노론 역모설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영조는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하였다. 노론 4대신 등 신임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을 모두 사면하고 그들의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처분(또는 乙巳換局)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 등 노론 중진들은 을사처분과 환국에 만족하지 않고 소론에 대한 보복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정국이 다시 노•소론 사이의 당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 영조는 갑자기 노론을 축출하고 이광좌를 수상으로 하는 소론정권을 구성하였다.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종년간에 있었던 노론들의 건저(建儲)와 대리(代理) 책동을 불충 행위로 규정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1728년 무신란(戊申亂: 李麟佐의 亂)을 겪고 나서였다. 원래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그가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急少)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위 초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자 과격파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들은 갑술환국 때 죄를 받고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일부 남인 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이 무신란이다.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오명항(吳命恒)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다. 미증유의 반란을 겪은 영조는 붕당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조문명(趙文命)•현명(顯命) 형제와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주장된 노•소론 안배의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이었다. 그들은 노소론간의 충역시비를 똑같이 인정하고 똑 같이 처벌한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편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관직을 임명할 때는 반드시 노•소론 관원들을 공평하게 1:1로 배치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노•소론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을 절충해 1729년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그리고 소론계의 조문명•현명, 송인명•서명균(徐明均) 등과 노론계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趙道彬) 등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파를 주축으로 하여 노•소론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국이 실현되었다. 이를 토대로 영조의 왕권과 정국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영조를 추대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린 노론 피화자들의 신원을 언제까지 묵살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는 영조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문제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의 양보를 얻어 점진적으로 노론 피화자들을 신원시켰고, 마침내 1740년(영조 16) 노론 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신임옥사가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인정하였다. 이를 경신처분이라 하였고, 뒤이어 대내외에 천명하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나라 전체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영조는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남•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였다. 쌍거호대 대신 유재시용(有才是用)의 인사정책을 취하여 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 등의 남인과 남태제(南泰齊)•임개(任拒)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이는 노론의 명분 아래 추진되었으므로 흔히 노론탕평이라 불리운다.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로 소론내의 과격파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소론 스스로 조태구•이광좌 등을 영조에 대한 불충으로 자가비판하게 되었다. 노론 측에서는 이를 신임의리(辛壬義理)라 하여 향후 장기집권의 기본명분으로 삼았다. 또 이를 ≪천의소감 闡義昭鑑≫이란 책자로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조정은 암묵적인 분열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영조는 1749년(영조 25)이래 왕세자(후일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세자가 신임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세자를 보호하려는 홍봉한 등의 외척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757년(영조 33) 원비 정성왕후가 죽고 1759년(영조 35) 정순왕후가 계비로 들어오자 국구 김한구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소론과 남인도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독자세력화를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노론 중심의 대탕평은 병들게 되었다.

1762년(영조38) 영조가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壬午禍變]은 영조 대 정치의 번민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겪으면서 영조는 점차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여 외척에 의존하였고, 여전히 탕평이 표방되기는 하였지만 실상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 척신세력에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이해를 좇아 이합집산하는 형국이 되었다. 대체로 영조말기의 정국은 왕세손을 등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외척에 비판적인 일부 관료가 청명당(淸明黨)을 형성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여기에 김한구계의 척신이 연결되었으며, 다시 왕세손(후일의 正祖)을 보호하는 세력과 이를 모해하려는 세력간의 암투가 전개되었다. 영조는 승하하기 몇 달 전 홍인한 등 권세가의 방해를 물리치고 왕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킴으로서 정조의 즉위가 무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이조낭관의 통청권(吏曹郎官通淸權)을 혁파하였고, 한림 회천법(翰林回薦法)을 회권법(會圈法)으로의 전환하였다.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산림(山林)의 정치적 위상을 격하시켰다. 또한 남설된 서원을 철폐하고, 노비신공을 반감하였으며, 군비와 군제를 정비하였다. 문예를 장려하고 국가적인 편찬사업을 벌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경제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1725년 각 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고, 한재에 대비하게 하였다. 1729년에는 궁방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였고,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법(里定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1760년에는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役夫)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개천(介川, 즉 오늘날의 청개천)을 준설하고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게 하였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다. 단순한 조세의 감액이 아니라, 모두 남자 성인들에게 1필역(一疋役)으로 균일하게 부담시킴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상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은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지주층의 부담을 높혔다. 양반 피역자들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하였고, 어염선세(魚鹽船稅)•은여결세(隱餘結稅) 등 국가세입에 빠졌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였다.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한 것은 균역법이 갖는 중요한 의의이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還穀分類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趙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 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1730년에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는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여 양역을 늘리고자 하였다. 서얼차대(庶孼差待)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1772년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던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과 사향(私享)을 금지시키고, 1741년에는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하여 서원 남설을 억제하였다.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蕩平科)를 시행하였고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하여 당색의 결집을 막고자 하였다.

영조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1729년에는 숙종 때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개조하게 하였다. 이듬해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만들게 하여 군기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1755년에는 조선전기 이래 친위군으로 존속해오던 금군(禁軍)을 정비해 용호영(龍虎營)으로 독립시켰으며, 해골선(海鶻船)을 통영(統營) 및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 만들도록 해 해군력을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였고,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고, 국가적인 편찬사업을 일으키고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1729년에 ≪감란록 勘亂錄≫을, 이듬해 ≪숙묘보감 肅廟寶鑑≫을 편찬하였고, 1732년에는 이황(李滉)의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을 간행하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재정리하고 여성들을 위한 ≪여사서 女四書≫를 언역(諺譯) 간행하였다. 1743년에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 良役實總≫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1754년 에는 ≪소학훈의 小學訓義≫•≪속오례의 續五禮儀≫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경국대전≫을 수정 보완하기 위하여 ≪속대전≫을 편찬하였다. 1747년 ≪황단의궤 皇壇儀軌≫를 편찬하였고, 형정을 맡은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 無寃錄≫을 보완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1749년에는 ≪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 1753년 ≪누주통의 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정통성을 천명한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편찬하여 내외에 반포하였고,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 三國基址圖≫•≪팔도분도첩 八道分圖帖≫•≪계주윤음 戒酒綸音≫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 ≪해동악장 海東樂章≫을 만들고, ≪여지도서 輿地圖書≫를 인간(印刊)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1770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근간이 되었다. 영조 자신도 많은 책을 친제(親製)하였다. ≪어제자성편 御製自省編≫, ≪위장필람 爲將必覽≫, ≪어제경세문답 御製警世問答≫•≪어제경세편 御製警世編≫•≪백행원 白行源≫•≪어제소학지남 御製小學指南≫•≪팔순유곤록 八旬裕崑錄≫•≪어제조손동보 御製祖孫同譜≫•≪어제효제권유문 御製孝悌勸諭文≫ 등이 있다.

영조는 1776년 83세로 승하하였다. 존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이고,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英祖)로 고쳐 올렸다. 능은 원릉(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다.

3.《영조실록》 총서

대왕의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인데, 숙종 원효 대왕의 아들이고 경종 선효 대왕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육상궁(毓祥宮) 숙빈(淑嬪) 최씨(崔氏)이고, 숙종 대왕 20년 갑술년 9월 13일 무인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탄생하였다. 기묘년 에 연잉군(延礽君)에 봉(封)해졌고, 경종 대왕 원년(元年) 신축년 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되었으며, 갑진년 에 즉위(卽位)하여 병신년 에 승하(昇遐)했으니, 왕위(王位)에 있은 지가 52년이고 수명은 83세였다.

(신승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