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규장각은 1776년 세조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있는 한국 최대에 한국학 여구기관입니다.

  • 조선시대 규장각 1776~
  • 서울대학교규장각 1946~
  •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1969.06~2006.01
  •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2006.02~현재
  • 연도표내려받기
왕립학술기관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후기의 왕립 학술기관이었던 규장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장각奎章閣’의 ‘奎’자는 천체天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 제왕帝王의 글을 ‘규장奎章’ 이라 부른 연유로, 조선에서 왕의 초상화·친필·저술·인장 등을 보관하는 건물을 규장각이라 이름 지었다.
1776년 정조正祖가 제22대 군주로 즉위한 직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한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글씨·그림,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전임專任 문신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능,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인 국내외 전적典籍을 수집 ·보관하는 기능, 서적을 출판하는 기능을 담당하였고, 한 때는 각신閣臣들이 왕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여하기도 했다.

규장각과 정조시대

일찍이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국왕의 친필로 쓴 ‘奎章閣’ 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1762년(영조 38) 후일의 정조는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면서 거처를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고 1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세손은 경희궁에 학문을 연구하고 논하는 장소로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을 세우고, 별도로 정색당貞賾堂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궁本宮인 창덕궁 금원禁苑에 규장각 창건을 명하였다. 9월에 2층 건물이 완성 되어 경희궁에 설치하였던 주합루를 2층으로 이전하였다. 그 건물의 아래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의 친필, 저술 등을 보관하였고, 별도로 서향각書香閣을 지었다. 곧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인장 등을 보관하고, 그곳에 보관되었던 선왕의 유품들은 봉모당奉謨堂을 새로 지어 옮겼다. 또한 주합루 일대에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건물을 지어 국내외 서적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 閣臣을 임명함으로써 규장각은 나라의 정식 기구로 발족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지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기구로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몰두하는 조정 신하들의 풍조를 일신하고 국정을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규장각을 설치 하고, 유능한 선비를 발탁 임명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고 정사政事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규장각이 설치된 1776년 12월에는 서적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소속시켜 서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들은 내각판內閣板 혹은 내각본內閣本이라 불렸는데, 판형이 정교하고 지질과 제본이 우수하여 당대當代부터 애장 愛藏되었다. 교서관 책판 1만 8천여 매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는 1781년 2월부터 37세 이하의 초급 문관 가운데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재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조는 교육과정을 규정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경전과 역사서 공부 및 문장 짓기를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하고 이에 대한 시험도 치렀다. 선발된 초계문신은 당대의 최고 인재들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개혁 정치의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왕실의 족보인 선보璿譜 등을 옮겼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부침浮沈

1800년(정조 24)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후부터 규장각의 기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양성된 정조의 친위 세력이 1년이 못되어 와해되었고, 규장각이 누렸던 국정 최고자문기관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계속 임명되었으나 명예직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고, 부여된 임무는 역대 왕의 저술과 친필 등을 보관하는 업무로 제한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직正職의 각신들보다 잡직雜織으로 서얼庶孼 출신이 임명되었던 검서관檢書官들의 임무가 컸다. 이들은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는 일을 계속 수행하였고, 중요한 서적의 출판시 감인監印(서적에 착오가 없는 지 확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863년(고종 즉위)에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규장각 현판이 종친부宗親府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규장각의 전통적인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초상화,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고 규장각에서는 주로 도서의 관리 임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실추된 종친부의 세력을 신장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1866년(고종 3)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건물과 소장도서 5천여 책을 방화 파괴하면서 의궤儀軌 3백여 책을 약탈해 갔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던 위 외규장각 의궤는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의 반환 교섭을 통해 2011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국내에 돌아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규장각의 기능도 대부분 경복궁에서 수행하게 되었고, 관리하던 도서들도 대부분 경복궁의 부속 건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1873년(고종 10) 이후 개화사상의 맹아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규장각의 위상도 잠시 높아졌다. 이 때 『이문원서목摛文院書目』 등 규장각이 소장한 책들의 목록이 편찬 간행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상해上海에서 서양의 책들도 상당히 구입하여 규장각 부속 건물에 비치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면서 규장각은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 귀속되었고, 이듬해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되어 궁내부 산하 6개 기관 중 하나로 격하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권이 바뀌고 왕실의 권한이 회복되면서 1897년(고종 34) 궁내부 관제가 개편될 때 규장원奎章院이 다시 규장각奎章閣으로 환원되고 기능도 회복되어 근대화 사업과 관계되는 신서新書를 다수 구입 관리하였다.

일제의 규장각 도서장악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융희 1) 11월의 관제官制 개정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대폭 변경되었다. 규장각은 전래의 기본 임무인 역대 왕의 저술과 유물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의 업무를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직제가 칙임勅任의 대제학大提學 1인과 제학提學 10인 이내, 주임奏任의 부제학副提學 10인 이내 외에고문으로 칙임의 기후관祇侯官 10인으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중신重臣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규장각의 주업무가 국유國有 도서 관리가 되면서,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등 도합 10여만 권이 규장각 도서로 통합되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다. 이때『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帝室圖書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이듬해 1911년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인수하고,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선원보첩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도서의 명칭을‘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정하였다.1923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이관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책이 총161,561 책이었으며, 그 중 일반동양도서로 분류된 20,648책을 제외한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창덕궁 내의 규장각 건물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문원.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고,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이안각移安閣과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은 남아서 오늘날 창덕궁 후원 안의 주요 명소가 되어 있으나, 열고관閱庫觀, 개유와皆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건물들은 헐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