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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의 유물 보존과 국왕의 국정 자문 학술기관으로 설립
일찍이 세조 9년(1463)에 양성지(梁誠之)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숙종20년(1694)에 이르러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국왕의 친필로 쓴 ‘奎章閣’ 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지금 규장각 전시실에 걸린 옛 현판이 숙종의 친필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영조38년(1762) 후일의 정조가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면서 거처를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고 1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세손은 경희궁에 학문을 연구하고 논하는 장소로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을 세우고, 별도로 정적당(貞적堂)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영조 52년(1776) 3월 선왕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궁(本宮)인 창덕궁 금원(禁苑)--현재통칭 비원(秘苑)--에 규장각 창건을 명하였다. 9월에 2층 건물이 완성되어 경희궁에 설치하였던 주합루를 2층으로 이전하였다. 그 건물의 아래층을 어제존각 (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의 친필, 저술 등을 보관하였고, 서재로 별도 건물 서향각(書香閣)을 지었다. 곧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인장 등을 보관하고, 그곳에 보관되었던 선왕의 유품들은 봉모당(奉謨堂)을 새로 지어 옮겼다. 또한 주합루 일대에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건물을 지어 국내외 서적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閣臣)을 임명함으로써, 규장각이 나라의 정식 기구로 발족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지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기구로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횡포가 심했던 척리(戚里), 환관(宦官)들과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몰두하는 조정 신하들을 배척하고 국정을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규장각을 설치하고 유능한 선비를 발탁 임명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고 정사(政事)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던 것이다.
서적 간행 기능을 흡수, 최고 권력기관으로
그 해 12월에는 서적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소속시켜 서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규장각 교서관에서 간행된 책들은 내각판(內閣板) 혹은 내각본(內閣本)이라 불렸는데 판형이 정교하고 지질과 제본이 우수하여 당대(當代)부터 애장(愛藏)되었다. 교서관 책판 1만 8천여매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6년(1782)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선보(璿譜: 왕실의 족보) 등을 옮겼다.
규장각 기능의 부침(浮沈)
정조24년(1800) 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후부터 규장각의 기능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양성된 정조의 친위 세력이 1년 이내에 와해되었고, 규장각이 누렸던 국정 최고기관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계속 임명되었으나 명예직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고, 부여된 임무는 역대 왕의 저술과 친필 등을 보관하는 규장각 명칭 본래의 업무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에는 정직(正職)의 각신들보다 잡직(雜織)으로 서얼(庶孼) 출신이 임명되었던 검서관(檢書官)들의 임무가 컸다. 이들은 역대 왕의 일기인 〈日省錄〉(일성록)을 기술하는 일을 계속 수행하였고, 중요한 서적의 출판시 감인(監印)을 담당하였다.
고종 즉위년(1863)에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규장각 현판이 종친부(宗親府)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규장각의 전통적인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초상화,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고 규장각에서는 주로 도서의 관리 임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실추된 종친의 세력을 신장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고종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규장각의 기능도 대부분 경복궁에서 수행하게 되었고, 관리하던 도서들도 대부분 경복궁의 부속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고종10년(1873) 이후 개화 사상의 맹아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규장각의 위상도 잠시 높아졌다. 이 때 〈文院書目〉(이문원서목) 등 규장각이 소장한 책들의 목록이 편찬 간행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상해(上海)에서 서양의 책들도 상당히 구입하여 규장각 부속 건물에 비치하였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규장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다. 고종31년(1894)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면서 규장각은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 귀속되었고, 이듬해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되어 궁내부 산하 6개 기관 중 하나로 격하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고종34년(1897)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권이 바뀌고 왕실의 권한이 회복되면서 궁내부 관제가 개편될 때 규장원(奎章院)이 다시 규장각(奎章閣)으로 환원되고 기능도 회복되어 근대화 사업과 관계되는 신서(新書)를 다수 구입 관리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외규장각(外奎章閣)의 파괴
고종3년(1866)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건물과 소장도서 5천여 책을 방화 파괴하면서 의궤(儀軌) 3백여책을 약탈해 갔다. 그 책들이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수년 전부터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반환 교섭을 벌여 왔다.
제실도서(帝室圖書)의 성립과 일제(日帝) 통치기의 규장각
고종이 순종에 양위한 직후인 융희1년(1907) 11월의 관제(官制) 개정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대폭 변경되었다. 규장각은 전래의 기본 임무인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의 업무를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직제가 칙임(勅任)의 대제학(大提學) 1인과 제학(提學) 10인 이내, 주임(奏任)의 부제학(副提學) 10인 이내 외에 고문으로 칙임의 기후관(祇侯官) 10인으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중신(重臣)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규장각의 주업무가 국유(國有) 도서 관리가 되면서,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 도합 10여만 권이 규장각 도서로 통합되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다. 이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帝室圖書)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이듬해(1911)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인수하고,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선원보첩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게되었고 도서의 명칭이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바뀌었다.
1923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책이 총 161,561책이었으며, 그 중 일반동양도서로 분류된 20,648책을 제외한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창덕궁 내의 규장각 건물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문원(이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고,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 이안각(移安閣)과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은 남아서 오늘날 창덕궁 후원 (통칭 秘苑) 안의 주요 명소가 되어 있으나, 열고관(閱庫觀), 개유와(皆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 건물들은 헐렸다.
광복 후의 규장각
1945년 8월 광복 직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경성대학(京城大學)으로 개편되었고, 1년 후인 1946년 10월에 서울대학교가 개교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국대학의 시설이 그대로 승계됨으로써 규장각도서도 규모나 보관 장소의 변경 없이 소관처의 이름만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바뀌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동란으로 규장각도서가 큰 위기를 맞았다. 북한군의 급작스러운 남침으로 이루어진 1차 서울 점령시에는, 규장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피난 대책이 전무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규장각 도서의 일부가 포장, 반출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다행히 원상복구되었다. 그 때 창경궁 내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었던 왕실 도서 중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통칭 적상산본(赤裳山本)이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였다가 3개월 후인 1951년 1월 4일 후퇴함으로써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다. 1.4 후퇴를 목전에 둔 급박한 시점인 1950년 12월 10일부터 28일 사이에 3차에 걸쳐 규장각도서 중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日省錄〉(일성록),〈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 등, 후일 모두 국보로 지정된 전적 8,657책이 군용 트럭에 실려 전시 수도(戰時首都) 부산으로 수송되었다. 전란 중에 이 도서들은 포장된 채로 부산의 관재처 창고,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남도청 창고 등을 전전하다가 정부가 환도한 수개월 후인 1954년 6월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서울에 남아 있던 도서들도 무사하였다.
정리작업의 시작, 국보지정(國寶指定)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규장각도서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작업이 시작되었다. 1962년 5월에 서울대학교 부속중앙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곧 〈奎章閣圖書韓國本書名索引〉(규장각도서한국본서명색인) 1부 4권이, 이듬해 1963년 8월에는 〈奎章閣圖書中國本書名索引〉(규장각도서중국본서명색인) 1부 1책이 완성되었으며, 1964년 9월부터 1966년 6월에 이르는 1년반 기간에 소장 고문서 52,000여건을 정리하였다.
1973년에는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日省錄〉(일성록),〈十七史纂古今通要〉(십칠사찬고금통요), 〈宋朝標전總類〉(송조표전총류) 등서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관악으로 이전과 소장도서의 확대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이 확대 개편되어 명칭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규장각 도서 전담 관리 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설치되었다. 초대 관리실장에 서기관 사서 유동렬(柳東烈)씨가 임명되었었으나, 4개월 후 법과대학 박병호(朴秉濠) 교수가 2대 실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규장각도서의 관리책임을 교수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규장각도서는 관악캠퍼스 중앙도서관 2층에 특별 서고를 마련하여 보관하였고,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가 구입한 고도서(古圖書)와 당시에 이미 서울대학교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던 일사문고(一蓑文庫), 가람문고, 상백문고(想白文庫)와 경제문고(經濟文庫)의 고도서 총합 6,380여책이 규장각도서로 분류되었고,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던 교서관(校書館) 책판 17,821장도 편입되었다. 1975년부터는 소장도서의 마이크로필름 작업을 시작하였다.
해제집과 목록의 발간, 영인출판 보급사업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규장각도서의 정리 작업의 결과가 1970년대 후반부터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0월에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經,子部〉(규장각도서해제--경, 자부) 1권을 효시로 1987년까지 8권이 완성 출판되었다. 1981에는 〈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 2권이 출판되었고, 이듬해는 중국본 종합목록도 출판하였다. 이 목록들은 학계에서 오랜 기간 기다려 온 듯 곧 품절되어 1983년에 재판되었다. 1977년에는 규장각 소장서에 대한 해제나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논문집 〈奎章閣〉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규장각 소장 전적 중에서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등은 이미 일제통치기에 영인 출판되었었으나 극히 제한된 소수의 학자들만이 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규장각 소장 〈朝鮮王朝實錄〉, 〈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 〈承政院日記〉 (승정원일기)를 영인 출판 보급함으로써 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0년대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蒙語類解〉(몽어류해) 등 몇 가지 도서를 산발적으로 영인하였지만, 규장각이 본격적으로 소장 전적의 영인 보급 사업을 추진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첫 대상으로 〈日省錄〉(일성록)이 선정되어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5년간에 총 86권으로 완간하였다. 1986년부터는 古文書 영인 출판 사업도 시작하였다.
중앙도서관에서 독립, 예산의 증액과 사업의 확대
1989년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되어 1990년 6월에 새 건물로 이사하고 9월에 개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규장각이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할 터전이 마련되었다. 1992년 3월 서울대학교 설치령(設置令)의 개정으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서울대학교 부속기관 규장각으로 독립하고, 초대 관장에 인문대학 국사학과 한영우(韓永愚) 교수가 취임하였다. 곧, 규장각 규정이 제정되고,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독립 기관으로서 기구가 정해지면서 도서관리와 열람 업무를 담당하는 사서와 더불어, 상근연구직(常勤硏究職) 학예사가 임용되어 자체 인력에 의한 연구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994년부터 서울대학교 자체 예산으로 편성되는 규장각 사업비가 대폭 증액되었고, 이보다 앞서 금호(錦湖)그룹에서 기금(基金)으로 5억원을 희사하였다. 또한 1993년부터 교육부에서 규장각을 비롯한 몇 개 기관을 선정하여 국학진흥을 위한 장기사업비를 계속 지원해 왔다. 사업비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소장 도서의 보급과 보존 사업을 대폭으로 확대할 수 있었고, 다수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개별 도서에 대한 해제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출판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각종 고지도(古地圖)와 의궤류(儀軌類)를 영인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일반 전적과 고문서들도 유별(類別) 총서로 기획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히 마멸되어 가는 지도류와 서화류의 표구(表具)와 훼손된 도서의 배접(褙接)도 1993년부터 수행하였다. 1994년에는 마이크로필름 기자재를 구입 설치하여 규장각 건물 내에서 소장도서를 촬영하고 마이크로필름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산화 사업 및 증축공사
전산화 시대에 규장각도 열외가 될 수가 없다. 규장각의 제1차 전산화 대상은 당연히 소장도서의 목록이었다. 1997년 5월에 소장 도서 목록의 전산화를 완료하였고, 10월에는 한국본 도서해제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전산망(LAN) 공사가 이루어졌고, 규장각 자체의 전산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부터 규장각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추진회와 더불어 정보통신부가 한국전산원에 의뢰하여 추진하는 한국 역사 정보 통합시스템 구축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이 사업은 규장각 등처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을 영상(이미지) 형태로 전산화 (디지틀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전산망에 공여함으로써, 연구자들이 인터넷으로 고전적(古典籍)에 접근하고 검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방대한 국가 예산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완성된 사업 결과는 www.koreanhistory.or.kr 과 www.e-kyujanggak.snu.ac.kr 에 등록되어 있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은 1990년대부터 시작한 각종의 대형 보급, 보존 사업을 계속 수행하는 한편, 위의 한국 역사 정보 통합시스템 구축 사업과 2002년부터 시작된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사업의 하나로 선정된 국학고전연구사업 (3년 한시사업) 및 2003년부터 시작된 토지문기(土地文記) 정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규장각의 사업이 대폭 확대되고 수행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기존 건물에서 업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공간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2003년 5월에 규장각 건물의 연면적을 2배 이상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착공하여 2004년 12월에 완공하였다.
한국학 전문연구기관 설립과 위상 확대
한국문화연구소는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를 협동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계발과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1969년 2월 12일 문리과대학 부설기관으로 설립되었다. 한국문화연구소의 설립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이룩된 소중한 결실이었다. 초대소장에는 청원운동을 주도해온 한우근(韓佑劤) 교수(국사학)가 취임하였으며 이기문(李基文) 교수(국어학)가 총무로서 활약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해체되고 캠퍼스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1976년 2월에 한국문화연구소는 인문대학 부설기관으로 귀속되고연구소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7월 13일 한국문화연구소는 대통령령 제9535호에 의해 법정연구소로 승격되고, 서울대학교 직할연구소로귀속되었다. 한국문화연구소가 창립된 지 10년만에 지위의 격상을 가져온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 3월 비로소 공식적인 연구소운영규정이 제정되어소장 밑에 연구부장과 자료도서부장을 두고 조교를 임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에 들어와 행정담당자가 파견됨에 따라 연구소의 조직에 행정실이 신설되어 각종 예산집행 및 공문서의 관리가 체계화되었고, 연구소의 공간도 종래 자료도서실만 있던 상태에서 소장실, 행정실, 자료도서실로 분리되었다. 1995년 8월에는 연구소가 7동으로 이전하면서 소장실·행정실·자료실·회의실·연구실 등을 별도로 갖추게 되었다.
총서 간행 및 정기학술지 발간
연구소는 창설 이후 첫 사업으로 수준 높은 연구총서의 발간에 역점을 두어 1970년부터 한국문화연구총서(韓國文化硏究叢書)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33권이 간행된 한국문화연구총서에는 한우근(韓佑劤), 이기문(李基文), 김용섭(金容燮), 박병호(朴秉濠), 김완진(金完鎭), 신용하(愼鏞廈), 조동일(趙東一), 한영우(韓永愚), 최승희(崔承熙) 등 한국학 각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연구업적이 포함되어 한국학연구에 새로운 활력소와 자극제의 구실을 하였다.
연구소는 1992년부터 서울대학교와 미국 스토니 브룩 소재 뉴욕주립대학교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영문판 한국학연구총서 간행사업의 서울대측 주관기관이 되어, 1차 사업으로1996년까지 5년간에 걸쳐 한국의 언어, 문학, 역사, 불교, 유교, 정치, 경제, 사회, 미술, 교육, 과학 등 11개 분야에 달하는 한국학연구총서를 간행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인문학육성지원사업·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을 신청하여 연구를 수행한 성과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국내외 한국학 연구기관에 보급하고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와 ‘한국문화연구소 한국학공동연구총서(韓國學共同硏究叢書)’를 간행하기로 계약하여, 연구원 통합 때까지 총 7권이 간행되었다.
한편 연구소는 한국학전문 정기학술지인 《韓國文化》를 1980년부터 1년에 1호씩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문화》는 연륜을 쌓아가면서 국어국문학과 국사학을 중심으로 한국학 여러 분야의 수준 높은 연구성과들이 발표되어 학계의 중요한 학술지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갔다. 연구소의 공동연구사업을 통해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됨에 따라서 1995년부터 1년에 1회 간행하던 《한국문화》는 17호부터는 1년에 2회 간행함으로써 연간 20편의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부터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고 해외의 한국학 학자들에게 국내의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 영문학술지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원 통합 전까지 18호가 간행된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는 국내에서 편집, 간행되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학 전문 영문학술지로서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학술발표회 개최 및 ‘한국학의 국제화’ 노력
1978년부터는 교내외 한국학 연구자를 초빙해 학술발표회를 갖기 시작하여 국어국문학·국사학을 비롯한 한국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성과가 학계에 발표되었다. 2006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총 100회에 걸쳐 개최된 학술발표회에는 국내 학자 뿐 아니라 외국의 한국학 교수들도 참여하여 국제학술교류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9년 11월에는 이렇게 확대된 연구소의 역량을 바탕으로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해마다 한두 차례씩, 연구원 통합 전까지 18회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학술토론회는 연구소에서 주관한 ‘규장각자료를 중심으로 한 연구’, ‘한국중세사회의 해체와 근대화과정’ 등 여러 연구사업의 성과를 발표·토론하여 대내외적으로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지원사업’으로 1999년부터 수행되고 있는 학제간 공동연구인 ‘한국근대 문화의 형성 과정’의 연구 성과도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한국학의 국제화’에도 힘을 기울여, 2000년 2월에는 중국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한·중 교류와 상호 인식의 자취’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개최한 바 있으며, 2002년 6월에는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Center for Korean Studies)와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북경대학 한국학연구중심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가 기획하는 Institute on Korean Culture and Society : Asian Studies Developement Program에 후원 연구소로 참여하여 2002년 6월 개최 기간 동안 후원하였다.
2001년 5월 24일에는 기존의 자료도서부를국제부로 변경하고 국제간 학술교류와 그에 관련된 사항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 후 2001년 11월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구부는 연구기획부로 편집부는 편집간행부로 국제부는 국제교류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공동연구사업 수행
1980년에 연구소 최초의 공동연구사업으로 ‘茶山思想의 종합적 연구’(연구책임자 : 한우근(韓佑劤))가 수행되었다. 1988년부터 한국학 분야의 오랜 숙원이었던 규장각 소장 자료를 이용한 대규모의 공동연구사업이 문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연구소의 주관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동연구사업은 국어국문학과 국사학을 중심으로 철학, 사회학, 인류학, 음악, 미술, 과학사 등 한국학 전 분야의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학제적 연구방식으로 추진되어 1993년까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1994년부터는 교육부와의 협의를 거쳐 연구소가 주관하는 대규모 공동연구사업의 명칭이 ‘고전작품 역주·연구 및 한국 근대화과정연구’로 수정되고 교육부의 재정지원도 증가하여 근대화과정연구와 함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장편대하소설과 국어학 자료에 대한 역주·연구도 병행함으로써 연구사업의 폭이 확대되었다.
1997년 3월부터는 ‘《日省錄》기사내용 및 주요어의 전산화작업’이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일성록》은 《朝鮮王朝實錄》,《承政院日記》,《備邊司謄錄》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찬사료이나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 연구를 통해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99년 12월부터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지원사업’으로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의 형성 과정 연구’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이 연구사업은 국사학, 국어학, 국문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학제간 공동연구사업으로 새로운 한국근대사회상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6년간 3단계에 걸쳐 수행되었다.
‘한국학 연구원’으로 확대·개편 추진 :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의 통합
한국문화연구소는 서울대학교의 유일한 한국학 연구기관으로서 공동연구, 자료 역주 및 정리, 연구서 출판, 정기간행물 간행 등 각종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연구소는 34년간의 축적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고립, 분산된 서울대학교의 한국학 연구 역량을 통합하여 학제간 대형 연구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단과대학 단위를 탈피한 한국학 전문 연구 기관으로의 전환을 기획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5월부터 시작한 교내 정책연구과제인 ‘한국학의 종합적 연구를 위한 한국학학술원의 설립 방안 연구’를 통해 교내의 여론을 수렴한 구체적인 확대, 개편안을 마련하였다. 2004년 12월에는 ‘서울대학교 한국학학술원(가칭) 기획안’을 작성하여 새로 설립할 한국학 연구기관의 필요성, 설립 방안, 세부 운영 계획, 예상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과정을 거쳤다.
2005년 6월에는 이태진(李泰鎭)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규장각 및 한국문화연구소 발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울대학교 내의 한국학 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통한 한국학 발전을 위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 두 기구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후, 구체적인 조직과 운영계획을 논의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설립(안)을 대학본부에 제출하였다.
2006년 2월 1일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라는 명실상부한 연구기관으로 재탄생하였다. 기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가 가지고 있던 조직과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규장각 소장 자료의 보존·관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출판·교육·보급 등의 사업을 보다 종합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설립은 한국학 연구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소장 자료의 효율적 관리 및 한국학 연구 사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정보자료관리부, 기반연구부, 기획연구부, 편집간행부, 학술교육부 등 5개의 부를 설치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으며, 행정실을 두어 각 부의 업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의 통합
2006년 2월 1일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라는 명실상부한 연구기관으로 재탄생하였다.기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가 가지고 있던 조직과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규장각 소장 자료의 보존·관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출판·교육·보급 등의 사업을 보다 종합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설립은 한국학 연구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소장 자료의 효율적 관리 및 한국학 연구 사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정보자료관리부, 기반연구부, 기획연구부, 편집간행부, 학술교육부 등 5개의 부를 설치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으며, 행정실을 두어 각 부의 업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편집일 : 2009. 9. 30 편집자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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