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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역대 왕의 유물 보존과 국왕의 국정 자문 학술기관으로 설립

일찍이 세조 9년(1463)에 양성지(梁誠之)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숙종20년(1694)에 이르러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국왕의 친필로 쓴 ‘奎章閣’ 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지금 규장각 전시실에 걸린 옛 현판이 숙종의 친필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영조38년(1762) 후일의 정조가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면서 거처를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고 1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세손은 경희궁에 학문을 연구하고 논하는 장소로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을 세우고, 별도로 정적당(貞적堂)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영조 52년(1776) 3월 선왕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궁(本宮)인 창덕궁 금원(禁苑)--현재통칭 비원(秘苑)--에 규장각 창건을 명하였다. 9월에 2층 건물이 완성되어 경희궁에 설치하였던 주합루를 2층으로 이전하였다. 그 건물의 아래층을 어제존각 (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의 친필, 저술 등을 보관하였고, 서재로 별도 건물 서향각(書香閣)을 지었다. 곧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인장 등을 보관하고, 그곳에 보관되었던 선왕의 유품들은 봉모당(奉謨堂)을 새로 지어 옮겼다. 또한 주합루 일대에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건물을 지어 국내외 서적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閣臣)을 임명함으로써, 규장각이 나라의 정식 기구로 발족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지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기구로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횡포가 심했던 척리(戚里), 환관(宦官)들과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몰두하는 조정 신하들을 배척하고 국정을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규장각을 설치하고 유능한 선비를 발탁 임명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고 정사(政事)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던 것이다.

서적 간행 기능을 흡수, 최고 권력기관으로

그 해 12월에는 서적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소속시켜 서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규장각 교서관에서 간행된 책들은 내각판(內閣板) 혹은 내각본(內閣本)이라 불렸는데 판형이 정교하고 지질과 제본이 우수하여 당대(當代)부터 애장(愛藏)되었다. 교서관 책판 1만 8천여매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6년(1782)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선보(璿譜: 왕실의 족보) 등을 옮겼다.

규장각 기능의 부침(浮沈)

정조24년(1800) 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후부터 규장각의 기능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양성된 정조의 친위 세력이 1년 이내에 와해되었고, 규장각이 누렸던 국정 최고기관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계속 임명되었으나 명예직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고, 부여된 임무는 역대 왕의 저술과 친필 등을 보관하는 규장각 명칭 본래의 업무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에는 정직(正職)의 각신들보다 잡직(雜織)으로 서얼(庶孼) 출신이 임명되었던 검서관(檢書官)들의 임무가 컸다. 이들은 역대 왕의 일기인 〈日省錄〉(일성록)을 기술하는 일을 계속 수행하였고, 중요한 서적의 출판시 감인(監印)을 담당하였다.
고종 즉위년(1863)에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규장각 현판이 종친부(宗親府)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규장각의 전통적인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초상화,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고 규장각에서는 주로 도서의 관리 임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실추된 종친의 세력을 신장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고종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규장각의 기능도 대부분 경복궁에서 수행하게 되었고, 관리하던 도서들도 대부분 경복궁의 부속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고종10년(1873) 이후 개화 사상의 맹아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규장각의 위상도 잠시 높아졌다. 이 때 〈文院書目〉(이문원서목) 등 규장각이 소장한 책들의 목록이 편찬 간행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상해(上海)에서 서양의 책들도 상당히 구입하여 규장각 부속 건물에 비치하였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규장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다. 고종31년(1894)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면서 규장각은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 귀속되었고, 이듬해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되어 궁내부 산하 6개 기관 중 하나로 격하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고종34년(1897)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권이 바뀌고 왕실의 권한이 회복되면서 궁내부 관제가 개편될 때 규장원(奎章院)이 다시 규장각(奎章閣)으로 환원되고 기능도 회복되어 근대화 사업과 관계되는 신서(新書)를 다수 구입 관리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외규장각(外奎章閣)의 파괴

고종3년(1866)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건물과 소장도서 5천여 책을 방화 파괴하면서 의궤(儀軌) 3백여책을 약탈해 갔다. 그 책들이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수년 전부터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반환 교섭을 벌여 왔다.

제실도서(帝室圖書)의 성립과 일제(日帝) 통치기의 규장각

고종이 순종에 양위한 직후인 융희1년(1907) 11월의 관제(官制) 개정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대폭 변경되었다. 규장각은 전래의 기본 임무인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의 업무를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직제가 칙임(勅任)의 대제학(大提學) 1인과 제학(提學) 10인 이내, 주임(奏任)의 부제학(副提學) 10인 이내 외에 고문으로 칙임의 기후관(祇侯官) 10인으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중신(重臣)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규장각의 주업무가 국유(國有) 도서 관리가 되면서,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 도합 10여만 권이 규장각 도서로 통합되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다. 이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帝室圖書)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이듬해(1911)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인수하고,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선원보첩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게되었고 도서의 명칭이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바뀌었다.
1923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책이 총 161,561책이었으며, 그 중 일반동양도서로 분류된 20,648책을 제외한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창덕궁 내의 규장각 건물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문원(이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고,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 이안각(移安閣)과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은 남아서 오늘날 창덕궁 후원 (통칭 秘苑) 안의 주요 명소가 되어 있으나, 열고관(閱庫觀), 개유와(皆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 건물들은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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